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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더/지리산 둘레길

<10일차> 기쁨도 슬픔도 품고 가는 길

지리산 둘레길-10일차

-기쁨도 슬픔도 품고 가는 길

 

12구간 출발지점인 삼화실 산도리 민박집 최일봉, 이명선 부부가 새벽부터 황토방 문을 두드리며 나를 깨웠다. 알고 보니 민박집 부부를 포함해 매실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단체로 부산으로 관광을 가는 날이었다. 마을사람들을 태우고 갈 관광버스가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어서 어지간히 마음이 바쁘셨던 모양이다. 그래도 나의 아침밥을 챙겨주고 가겠다는 마음이 고마웠다. 간신히 일어나기는 했지만 밤새 세찬 빗소리에 잠을 설친 상태였다. 세수도 못한 채 민박집 안주인께서 차려 준 아침상을 받았다. KBS 1TV ‘한국인의 밥상최불암씨가 방송촬영을 위해 이집에 와서 먹었다는 상차림 그대로였다. 진수성찬에 마음껏 배불리 먹었다. 비는 말끔하게 그쳤지만 습하고 더웠다. 출발에 앞서 둘레길 지도를 펼쳐 놓고 오늘 걸어야 할 여정을 살펴보았다. 하동 악양은 내가 태어나고 10살까지 자란 곳이다. 하루만 더 걸으면 고향 마을인 악양에 도착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둘레길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도 들릴 계획을 세웠다.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담뱃불을 막 붙였다. 믹스커피 한 모금에 담배 한 모금. 열흘 동안 출발에 앞서 습관처럼 해오던 의례다. 그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집사람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집사람은 다급한 목소리로 장모님이 세상을 버리셨다는 비보를 전했다. 최근 들어 기력이 약해지긴 했지만 지병은 없었던 분이었다. 갑작스럽고 믿기지 않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하동읍내로 가는 첫 버스가 아직 마을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모든 일정을 접고 급히 서울로 향했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는 일을 만나기 마련이다. 지리산둘레길을 걷기 시작한 지 열흘째 되는 201775일 아침이었다.

 

 

 

지리산둘레길은 총 285km. 둘레길을 걷기 시작한 열흘 동안 142km를 걸었다. 절반 정도는 걸은 셈이다. 사서 한 고생이었고, 더운 여름에 시작한 무모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불혹을 훨씬 지나 지천명을 앞둔 나이에 나름 값진 경험으로 남았다.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걸어야 할 때도 있었고, 때론 점심을 거르기도 했다. 하지만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따뜻했고,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는 늘 같은 자리를 지키며 차분했다. 참 바쁜 세상살이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어서 행복했고, 어려움에 처한 순간에는 뜻하지 않은 호의에 감사했다. 블로그를 통해 다시 한 번 그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운봉읍 삼산면 장수민박 박점선 할머니.

 

 

남원 산내면 장항마을 아코디언 민박 손윤례 할머니.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 큰집민박 한옥문 할머니.

 

민박집을 못찾아 헤매는 나를 위해 기꺼이 잘 방과 음식을 내 주신 산청군 가현마을 추석호 선생님.

 

산청군 단성면 어천마을 물가민박 안병두.문순귀 부부

 

산청군 시천면 중태마을 엽잔수민박 송정근,이명엽 부부

 

 

하동군 청암면 김복순 할머니.

 

 

산청군 청암면 반월마을 정봉기 할머니.

 

87살 연세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짓고 있는 산청군 시천면 중태마을 최옥영, 민혜야 노부부.

**결혼해 64년째 살고 계시는 노 부부에게 기념이 될 듯 해서 이사진을 크게 인화해 택배로 보내드렸다.

 

 

***둘레길 길목마다 나무 이정표는 내가 길을 잃지 않도록 오른팔을 뻗어 가야할 방향을 안내해 주었다. 첫째 날과 둘째 날까지는 모양새가 특이한 이정표만 카메라에 담았지만 그 이후로는 길가다 만나는 모든 이정표를 찍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9일째 되던 날 하동 청암면 횡천강 징검다리를 건너는 장면을 찍다 물에 빠트렸던 소니A 알파6500 카메라는 새로 사는 만큼의 수리비가 나와 수리 자체를 포기하고 말았다.) 뜻하지 않게 지리산둘레길 여정을 갑자기 중단하게 되었지만 그 길 위에 서 있는 이정표를 다시 찍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그때는 여정이 중단되었던 하동 삼화실 마을에서부터 다시 시작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