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7일차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너다.
오늘은 하루가 너무 길었다. 정말 길었다. 왜냐하면 너무 일찍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일찍 깨우셨기 때문이다. 어천마을 물가민박 문순귀 할머니께서 7시도 되기 전부터 방문을 두드리신다. 어서 와서 밥 먹으라고...알고 보니 일요일이라 내외분이 읍내 교회에 가셔야 했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셨던 거였다. 세수도 못하고 아침밥을 먹었다. 덕분에 출발이 가장 빨랐다. 숙박비와 밥값을 셈하고 나셨는데 할머니께서 뒤 따라 나오셨다. ‘돈을 덜 드린 것은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찰나에 만 원짜리 한 장을 돌려주신다. 내가 만원을 더 내고 왔던 것이다.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도 굳이 문밖까지 따라 나오셔서 기어이 주고 가신다. 덤으로 밭에서 따온 오이 하나와 토마토 3개를 비닐에 싸 주신다. 산에 가면서 시장할 때 먹으라고. 아침밥 챙기는 것도 수고로운데, 새벽에 밭에서 따온 오이와 토마토까지 챙겨 주셨다. 아직 시골인심은 살아있는게 분명하다. 너무 감사해서 기념사진을 찍어드리겠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손사래를 치신다. 그러더니 곧바로 정원에 있는 바위에 두 분이 자세를 잡고 앉으신다.ㅎㅎ
어천마을 물가민박 주인장이신 안병두 문순귀 부부.
물가민박 정원에 차려진 아침상.
풍현마을과 어천마을을 잇는 아침재를 지나 높이 1,099m의 웅석산 초입에 들어섰다. 웅석봉은 백두대간의 들머리다. 그만큼 산세가 웅장하다. 웅석봉 턱밑인 8부 능선까지 오늘 올라야한다. 비까지 오려고 하늘이 잔뜩 흐려있다. 비가 많이 온다는 예보도 있었다. 겁이 덜컥 났다. 오를 수 있을까? 출발할 때 민박집 할머니의 격려가 없었다면 우회로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 말씀의 요지는 밑에서 보면 까마득하지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오르다보면 정상이 나온다는 거였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올랐다. 꼬박 2시간 걸렸다. 시간당 에너지 소비가 가장 많았던 것 같다. 안개까지 자욱해서 등산로도 제대로 안보였다. 그러나 할머니 말씀대로 그냥 생각 없이 오르니 과연 정상이 나왔다.
응석봉 턱밑까지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속 햇살이 비치는 곳이 응석봉 8부 능선이다.
일찍 출발한 탓에 7구간 종착지인 운리에 오후 1시에 도착했다. 원래 계획은 운리까지였지만 또 결정을 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8구간인 운리~덕산마을 구간은 중간에 마을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시작하면 무조건 끝까지 가야한다. 그것도 산길 14km를 장장 5시간에 걸쳐서.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할머니가 싸주신 오이와 토마토를 점심 대용으로 먹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후 2시. 기어이 출발했다. 그 결과는...개고생이었다....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했다. 응석봉 밑에서 안개가 순식간에 밀려 올라오고 있다.
하루 종일 날씨가 오락가락했다. 비가 오다가도 햇살이 비치고, 그리고 다시 비가 내리고. 우산을 접어다 폈다 10번은 반복한 듯하다. 우산을 들고 걸으면 스틱을 양손에 잡을 수 없어 힘이 더 든다. 비가 거세지자 고어텍스 등산화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빗물이 스며들어와 양말까지 젖었다. 결국 양말을 3번이나 갈아 신었다. 운리에서 시작된 오르막 산길은 남명 조식 선생이 자주 찾았다는 백운계곡까지 이어졌다. 둘레길에서 가장 참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지나 백운계곡에 도착하니 오후 3시 반이었다. 계곡물에 땀을 씻고 출발하려는데 세차게 비가 또 내린다. 점심때 먹은 오이 하나와 토마토 3개는 결국 허기를 속이지 못했다. 비는 내리고 배는 고프고. 산청 지역 둘레길에 들어와서는 이틀 연속 점심을 굶은 셈이다. 산청 구간 둘레길은 나쁘다. 중간에 점심 먹을 마을을 지나가도록 했어야지. 정말 나쁘다 나빠!
문순귀 할머니께서 준비해주신 오이 1개와 토마토 3개.
비가 온 탓에 숲속이 너무 눅눅하고 음산하기까지 해서 마을이 나오기만을 확수고대하며 쉬지도 않고 걸었다. 끊임없는 숲길과 계곡을 건너 오후 4시 15분에서야 첫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두 채 밖에 안 되는. 그래도 빨간 지붕이 있는 집을 보니 반갑고 안도감이 들었다. 아마도 오늘 그 길을 걸어간 사람은 나 밖에 없었을 거다. 비가 와서 어둡고 울창한 숲을 걷다보니 겁이 많은 나로서는 솔직히 무서웠다. 대신 맑은 날 걸었다면 참나무 숲으로 햇살이 들어 참 좋았을 것 같다.
숲속에 잠시 햇살이 들었다.
다시 안개가 끼고,
숲속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백운계곡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둘레길 안내지도가 비에 젖어 찢기고 헤어져 있다.
덕산마을로 내려오다가...달팽이야 너는 언제 집에 갈래?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서 밭에 나간 농부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개울에 빠진 하늘과 구름.
오후 7시가 되어서야 8구간 종착지인 덕산마을에 도착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에 젖고 땀에 찌든 몸은 녹초가 되었다. 7,8 구간을 하루에 걷기에는 사실 무리였다. 쉬었던 시간을 빼더라도 장장 10시간을 걸은 셈이다. 덕산읍내를 흐르는 덕천강을 지나다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생각났다.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너다.' 사실 나도 하루에 강을 아홉 번 건넜다. 덕천강과 백운계곡 등 8곳의 계곡물을 지났기 때문이다. 계곡물도 나중에 강물이 될 테니까 억지를 보태서 9개의 강을 건넌 셈이다. 숙소는 덕산 읍내에서 30분 떨어진 중태마을에 잡았다. 내일 9구간 종착지는 위태마을이다. 중태마을. 위태마을. 이름이 참 공교롭다. 어쨌든 오늘 중태마을에 도착했을 때 내 몸 '상태'는 '중태'였고, 내일 위태마을까지 가는 길도 만만찮다고 하니 몸이 '위태'롭기까지 할 것 같아 참으로 걱정이다.
산청군 중태마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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