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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더/지리산 둘레길

<5일차> 매번 좋은 일만 있을 순 없다.

지리산 둘레길-5일차

-매번 좋은 일만 있을 순 없다.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였다. 출발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로웠다. 황토 집에서 하룻밤을 푹 자고 나니 몸도 개운했다. 숙식과 잠자리를 무료로 제공해 주신 산청 가현마을 추석호 선생님이 아침에도 오곡밥을 준비해 주셨다. 선생님과 작별을 고하고 잠시 이탈했던 둘레길 5구간 지역으로 다시 내려갔다. 오전 11시에 전날 마지막으로 통과했던 방곡마을에 도착했다.

 

둘레길 이정표. 붉은색 화살표가 내가 진행해야 할 방향을 표시해준다.

 

검은색 화살표는 반대 방향을 의미한다.

 

지난밤 숙소를 흔쾌히 허락 하신 추석호 선생님.

 

5구간은 거의 숲길이었다. 등산 스틱과 장갑을 꺼내려고 잠시 배낭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등산 장갑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까지 분명 끼고 있었던 장갑인데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등산 스틱을 꺼내 높이 조절을 하려고 한쪽으로 돌렸더니 손잡이가 툭하고 부러져 버렸다. 예전부터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스틱이었는데 결국 오늘 사단이 나고 말았다. 산길에서는 등산 스틱이 없으면 힘이 몇 배 이상 들어간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닷새 만에 결국 부려진 등산스틱.

 

상사폭포.

 

숲속에서 만난 나리꽃.

 

종착지인 수철마을까지는 큰 고개 2개를 넘어야했다. 첫 번째 고개인 쌍재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쯤이었다. 고개 하나만 더 넘으면 크게 땀 흘릴 일이 없어 보였다. 문제는 두 번째 고개를 넘어도 마을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점심때가 한참 지났지만 밥을 먹을 만한 곳이 없었다. 지도를 살펴봐도 마을 표시는 없었다. 다섯 시간에 걸쳐 큰 고개 2개를 넘다보니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이었고 배도 많이 고팠다. 올레길 안내책자에 '이 구간은 점심을 해결할 곳이 마땅치 않으니 도시락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라는 언급이라도 해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그 순간 운봉 장수민박 박점선 할머니가 챙겨주신 곶감과 호두가 배낭 속에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며칠 동안 먹지 않고 배낭 속에만 두었던 곶감을 꺼내 들었다. 짓눌려 모양은 볼품없었지만 배가 너무 고팠던 터라 꿀맛 같았다. 역시 박 할머니는 먼 길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으셨다.

 

다시 등장한 곶감과 호두.

 

 

 

고개 두개를 힘겹게 넘고 나니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오르막길은 없다는 안도감으로 고개를 내려오던 중이었다. 갑자기 바로 옆 숲에서 내 발걸음 소리에 놀란 산짐승이 굉음을 내며 줄행랑을 쳤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가 더 놀라고 말았다.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마침내 오후 4시쯤 5구간 종착지인 수철마을에 도착했다. 마실 물도 떨어져 탈진할 지경이었지만 마음에 드는 민박집을 찾기 힘들었다. '더 갈 것이냐, 아니면 이 마을에서 멈출 것이냐'....사실 둘레길을 닷새 동안 걸으면서 이 문제는 매번 고민거리였다. 시간을 보니 해가 지기 전까지 조금 더 걸을 수 있을 듯 했다. 그래서 오늘은 전자를 택했다. 결과적으로 그 결정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5구간 종점인 수철마을의 도레미파솔라시도 장독대.

 

지친 가운데 그나마 잠시 웃었던 순간.

 

다행히 6구간은 숲속 길이 아니라 논두렁과 마을을 지나는 평탄한 구간이었다. 안심하고 출발했다. 지막, 평촌, 대장마을을 지났지만 민박을 치는 마을이 없었다. 오후 6시가 넘어서자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30분이 지나자 결국 비가 내렸다. 가뭄 끝에 오는 반가운 비였지만 길에서 비를 맞아야하는 내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제는 싫고 좋고 따질 겨를이 아니었다. 경호강 다리를 지나자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더 이상 전진하기에는 무리였다. 다행히 민박집 간판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무작정 가까운 민박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오늘은 지쳤다.

 

 

힘은 들지만 그래도 둘레길은 좋은 여행지다.

 

래프팅 명소인 경호강에 인접해서인지 지금까지 민박집에 비해서 값이 비쌌다. 주인아주머니는 저녁도 근처 식당에서 사먹어야 한다고 했다무려 8시간의 강행군 끝에 옷까지 비에 젖어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야속한 마음까지 들었다. 결국 주인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숙소에 들어와서 몸을 씻고 나니 피로감이 물밀 듯 밀려왔다. 인생사가 그렇듯이 여행에서도 매번 좋은 일만 있을 순 없다. 그나마 오늘은 단비라도 내려줘서 다행이다. 사실 이번 둘레길 여행은 완주가 목표가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좀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 다시 평정심을 찾아야겠다. 마침 내일은 토요일 이고하니 좀 쉬엄쉬엄 걸어 볼 생각이다.

 

반가운 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