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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더/지리산 둘레길

<9일차> 왜 혼자 걷냐고 묻는다.

지리산 둘레길-9일차

-왜 혼자 걷냐고 묻는다.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다.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전쟁터에서 총을 잃은 병사와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겠다. 궁항마을 민박집 부부가 아침부터 하동읍내에 볼일이 있다며 새벽부터 재촉하신다. 윤리 선생님으로 정년퇴직을 하신 민박집 어르신이 학교 종을 땡땡땡 치신다. 와서 밥 먹으라는 신호다. 내가 아침을 먹자마자 부부는 차를 타고 읍내로 서둘러 나갔다. 아침을 일찍 먹게 되는 바람에 출발이 또 빨라졌다. 다행히 민박집 사장님은 점심 도시락을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지난밤 모기와의 전쟁을 벌이느라 잠을 설쳤다. 그래서인지 출발하는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다.

 

상존티마을 김두례 할머니. /아이폰6

 

출발하자마자 끊임없는 언덕길이다. 9일째라서 그런지 이제 슬슬 몸도 무거워졌다. 한걸음 한걸음 내딪는게 천근만근이다. 1시간을 낑낑그리며 간신히 양이터재에 도착했다. 양이터재는 하동군 옥종면과 청암면을 잇는 고개다. 내려가는 길은 숲길 대신 임도를 택했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숲길이 밤처럼 어두웠기 때문이다. 1시간 만에 10구간 종착지인 하동호에 도착했다. 말라붙은 하동호를 바라보며 땀을 식히고 있는데 마을사람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혼자 다니세요?' '' '아니 같이 다니시지...' 이래저래 사정을 얘기했더니 수긍하신다. 그런데 지나가는 마을마다 어르신들께 먼저 인사를 건네면 왜 혼자 걷냐고 묻는다. 처음에는 이래저래 사정을 얘기했지만 다음부터는 '아 예 사정이 있어서요...'라고 짧게 대답하고 만다. 어르신들은 왜 혼자 걷는지가 관심사인가 보다. 나는 혼자 걷는 게 좋은데 말이다.

 

오전은 맑았다.

 

오후에는 가끔 맑았다./아이폰6

 

그리고는 간간히 소나기가 내렸다.

 

물론 혼자 걷는 게 단점도 있다. 일단 숲이 울창해 길이 너무 어둡거나 적막할 때는 같이 걷는 말동무가 있었으면 할 때도 있다. 밥을 혼자 먹게 될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혼자 걷는 게 편할 때가 더 많다. 가고 싶으면 가고, 쉬고 싶으면 쉬고의견을 일일이 물어볼 필요도 없고 눈치 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결정하고 즉시 실행하면 되기 때문에 번거로움도 적다. 아무튼 혼자 걷는 더 좋다.

 

혼자 걷고 있지만 이때까지만해도 친구이자 동지인 카메라가 함께 있었다.

 

하동댐을 내려와 도시락을 먹었다하늘에 구름은 많았지만 날은 몹시 무더웠다. 보통 물통 하나로 하루를 버티는데 오늘은 오전부터 물통이 비었다. 청암면사무소에 들어가 물통에 물을 채우고 그동안 모아둔 잡다한 쓰레기도 정리했다배낭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소나기가 10분간 세차게 쏟아졌다. 여기도 장마가 시작된 모양이다. 청암면에 들어서부터는 그의 평지길이다. 논두렁길을 지나니 횡천강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사단은 이곳에서 벌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민박집 할머니가 싸준 주먹밥.

 

 

들깨모종을 심고 오는 김복순 할머니(81)가 징검다리를 건너오는 모습을 찍고 난 후 얘기를 건넸다. 할머니는 왜 또 혼자 다니냐고 묻는다. 짧게 대답했다. 연세에 비해 젊어 보인다고 했더니 할머니는 대뜸 공기 좋고, 물 좋고, 마음 편하니 늙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할머니가 떠난 뒤 징검다리를 건너며 삼각대를 놓고 셀카를 시도했다. 몇 번의 시도를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겠다고 마음먹고 바위에 삼각대를 걸쳐 놓았다. 소나기에 젖은 바위가 미끄럽기는 했지만 한두 번 하는 게 아니니 별 일 없을거라 방심한 게 문제였다. 그러나 별일이 생기고 말았다. 삼각대가 미끄러지며 카메라가 통째로 물속에 빠져 버린 것이다. 이런……. 결국 카메라는 횡천을 건너다 황천으로 가고 말았다. ㅠㅠ

 

들깨모종을 들고  횡천강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는 김복순 할머니.

 

징검다리를 무사히 건넌 김복순 할머니.

 

재빨리 건져냈긴 했지만 카메라와 렌즈는 내부까지 물에 흠뻑 젖어 버렸다. 낭패다. 유일한 카메라였는데...A/S센터에 전화를 했더니 서울로 빨리 가져오던가 택배로라도 부치란다. 나 참...아직은 좀 더 둘레길을 걸어야하는데작고 가볍고 성능이 좋아서 둘레길에서는 최고의 동반자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지나는 사람마다 왜 혼자 걷냐고 묻는다. 어떻게든 물을 빼려고 기울여도보고 흔들어도 보고 했지만 렌즈는 이미 안쪽부터 습기가 차올랐다. 맨붕에 빠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배낭을 논두렁에 놓고 가벼운 차림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청암읍내 마트에서 물먹는 하마를 구입했다. 카메라 본체와 렌즈를 분리해 각각 비닐봉지에 넣고 물먹는 하마를 하나씩 넣었다. 습기를 조금이라도 제거해보자는 나름의 응급조치였다. 배낭에 집어넣기에는 부피가 너무 커 결국 한손에 들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지쳐 있는데 한 손까지 쓸 수가 없으니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ㅠㅠ

 

재빨리 수습했지만.../아이폰6

 

렌즈에 가득찬 습기./아이폰6

 

 

햇볕에 말려보아도 소용이 없었다./아이폰6

 

 

삼각대를 걸쳐 놓았던 문제의 돌멩이./아이폰6

 

물먹는 하마를 투입해 응급조치./아이폰6

 

카메라와 렌즈와 물먹는하마 3개가 함께 들어 있는 비닐 봉지/아이폰6

 

어쨌건 11구간 종착지인 삼화실을 향해 출발을 했다. 카메라가 물에 빠지는 바람에 1시간이나 지체됐지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쉬엄쉬엄 가보기로 했다. 읍내를 한참 지나 반월마을을 통과하고 있었다. 앞쪽 논가에서 한 할머니가 나뭇가지를 허공으로 휘저으며 새를 쫓고 있다. '~~' 작은 체구였지만 할머니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옆으로도 논이 많았는데 유독 할머니의 논에만 백로가 앉는다. 알고 보니 할머니의 논에만 논 고동(우렁이)을 풀어 놓는 친환경 농법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반월마을에 사시는 올해 84세인 정봉기 할머니였다. 18살에 이곳으로 시집와서 5남매를 두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힘겹게 걷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집에 가서 찬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또 왜 혼자 걷느냐고 묻는다. ㅠㅠ

 

모낸 논에 앉은 백로를 쫓고 있는 정봉기 할머니/아이폰6

 

쫓아도 또 쫓아도 다시 찾아오는 백로때문에 논을 지키고 있는 할머니./아이폰5

 

찬밥이라도 먹고가라며 권하셨지만 안타깝게도 물에 빠진 카메라 생각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할머니...하짐난 마음만은 감사했습니다./아이폰6

 

둘레길에서 친구가 되어준 카메라가 물에 빠지는 황당한 일을 겪고 나니 의욕마저 상실했다. 계속 가야할지 심각하게 고민도 했지만 사진찍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계속 전진했다. 내가 잘못한 일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안타깝기는 했다. 목적지인 삼화실까지는 큰 고개를 또 넘어야했다. 장장 2시간을 가파른 언덕길을 올랐다. 산세가 점점 사나워졌다. 다시 산골로 들어온 것이다. 산골마을은 해도 일찍 졌다. 저녁 7시에 삼화실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산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삼화실은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마치 분지처럼 보였다. 이곳저곳 민박집을 찾아다녀야하는 수고로움은 없었다. 마을이 큰데도 불구하고 민박하는 집이 딱 한 곳 밖에 없었으니까.

 

물통에 물을 채우기 위해 들렸던 상존티 마을 김두례 할머니집. 할머니는 취나물을 솥에다 끊이며 불 곁을 지키고 있었다./아이폰6

 

솥에 끊고 있는 취나물을 간간히 저어주기위해 대나무 작대기를 놓지 못하고 있는 김두례 할머니./아이폰6

 

김두례 할머니가 시장할테니 먹어보라고 건넨 삵은 감자. 할머니 말은 못하고 있었지만 저 그때 정말 시장했어요...정말로 꿀맛이었다./아이폰6

 

상존티 마을 베어진 대나무 밭./아이폰6

 

대나무밭의 주인인 김봉민씨가 대나무를 자르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자신의 대나무밭이 담양의 죽녹원보다 더 아름답다고 자랑했다./아이폰6

 

우편집배원 출신의 최일봉,이명선 부부가 운영하는 산도리 민박이다. 삼형제가 모두 하동우체국에서 우편집배원으로 은퇴했다고 한다. 민박집은 황토방이었다. 똑같은 방이 두 개 있길래 어느 방을 쓰면 되냐고 물었다. 아무방이나 쓰라고 하신다.  아들만 둘인 할아버지는 큰며느리가 오면 오른쪽방을, 작은며느리가 오면 왼쪽방을 쓰게 한다고 했다. 오른쪽 큰며느리방에 짐을 풀었다. 내가 늦게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던 할아버지와 겸상을 하며 저녁을 먹었다. 할아버지가 또 묻는다. '왜 혼자 걷냐고' ㅠㅠ

사실 카메라가 강물에 빠지기 전까지는 혼자 걷냐고 물을때 별 생각 없이 대답하곤 했는데 카메라가 손에 없으니 이제 정말 혼자 걷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니 산골마을에 또 비가 세차게 내린다. 오늘은 개구리 울음소리마저 없으니 더 적막한 밤이다.

 

산골은 저녁은 평지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이폰6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완성하고 카메라는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