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6일차
-바다로 간다고 해서 반드시 큰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밤사이 비가 제법 내렸다. 간밤에는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비는 그쳤다. 출발하려고 짐을 챙기고 있었는데 숙박을 했던 마당머리마을 사계절 민박집 최정임 할머니께서 아침을 먹고 가라신다. 어젯밤에는 분명히 아침밥은 안 된다고 하셨는데 생각치도 못한 일이다. 야박하다고 혼자 생각했었는데 미안하고 감사했다. 식은 밥이라더니 온기까지 있었다. 할머니는 밥값도 받지 않으셨다. 둘레길 여행 잘 하라며 격려도 해주신다. 속이 든든하니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경호강을 바라보며.
사계절민박 최정임 할머니께서 차려 주신 아침밥상.
6구간은 수철마을에서 성심원까지 16km 구간이지만 어제 무리해서 온 덕분에 출발부터 절반은 온 셈이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자마자 이정표에 두 갈래 길이 표시되어 있다. 어디로 가던 목적지는 같았다. 다만 한쪽은 짧고 다른 쪽은 두 배 이상 길었다. 6구간의 반을 앞서 출발했기에 급할 것도 없었다. 긴 구간을 택했다. 마을을 막 벗어나 숲길을 들어섰는데 고라니 한마리가 휙하고 내 앞을 지나간다. 놀란 쪽은 나였는데 고라니가 더 다급하게 줄행랑을 친다. 1시간쯤 지나니 다시 비가 내린다.
가는 방향에 두 갈래 길이 있으면,
합류지점에서 되돌아 가는 길도 두 개가 있을 수 밖에.
숲길이 이어졌지만 어제보다는 경사가 덜 심해 좋았다. 숲길을 벗어나니 임도가 이어진다. 임도 끝에 도착하니 시야가 확 터졌다. 잠시 쉬어갈겸 배낭을 내려놓았다. 앞쪽으로 경호강이 흐르고 강을 따라 대전-통영 고속도로가 놓여 있다. 고속도로에는 자동차가 속도를 내고 달린다. 그동안 둘레길을 걸어온 거리를 계산해보니 대략 80km 정도였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는 1시간에 100km를 달린다. 자동차로 1시간이면 갈 거리를 나는 엿새 동안 땀 흘리며 걸어 온 셈이다.
비가 내리자 말라 있던 계곡에 생기가 돌았다.
풍광이 좋아서 한 참을 그곳에서 넋을 잃고 있었다. 바로 앞쪽 대나무 밭에는 올해 막 순을 올린 대나무들이 3m이상 곧게 뻗어 있었다. 직박구리 한마리가 그 대나무 가지에 내려앉았다. 순간 직박구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가지가 휘어지며 부러져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놀란 새가 놀라 떨어지며 날갯짓을 하더니 간신히 하늘로 다시 올랐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마냥 웃을 일만은 아니었다. 나 역시 삶의 무게를 알지 못한 채 언제 부러질지 모르는 여린 가지 위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바람재에 도착하니 갈림길이 다시 만난다. 4km를 더 돌아 온 거였지만 어제보다는 컨디션이 좋았다. 6구간 끝지점인 성심원에는 오후 2시에 도착했다. 성심원은 한센병 후유 장애 어르신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점심을 먹을 곳을 찾아봤지만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오늘도 점심을 굶어야 할 모양이다. 당연히 6구간이 끝나는 곳이라 식사를 해결할만한 곳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폐 축사가 갤러리로 변신한 듯.
경호강이다.
결국 7구간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마을인 어천마을까지는 경호강을 따라 나 있는 산길이다. 3km정도의 짧은 구간이었는데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물통에 물도 다 떨어졌다. 오후 3시가 넘어서야 겨우 어천마을에 도착했다. 오늘은 더 이상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민박집을 찾으려고 보니 다 펜션 밖에 안 보인다. 마을을 벗어나 30분을 더 걸어가니 민박집 간판이 하나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갔다. 계곡 옆이라 민박집 이름도 물가민박이다. 본채는 일반 시골집이었는데 정원은 넓고 예뻤다. 안병두 할아버지와 문순애 할머니 내외분이 하시는 민박집이다. 점심을 굶어서 라면이라도 먹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조금만 기다렸다가 함께 이른 저녁을 먹자고 하신다. 따를 수밖에...
오늘 점심은 결국 오이 하나.
엿새 동안 입었던 옷을 오늘 찾은 물가민박에서 처음으로 빨아 말렸다.
민박집 정원을 가꾸시는 문순귀 할머니.
민박집 안병두 할아버지께서 내일 갈 7구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고 계신다. 직접 제작한 자료라고 하셨다.
물가민박 주인이신 안병부, 문순귀 부부 내외분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다래나무 가지치기를 깔끔히 끝내셨다.
방에 짐을 풀고 배낭 속 깊숙이 놓아두었던 책을 꺼내 들었다.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동안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럴 여유가 닷새 동안은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저녁밥을 기다리며 책을 들고 물가 그늘로 갔다. 중국의 문호 소동파가 유배지에서 쓴 산문집이다. 벌써 네 번째 읽고 있는 책이지만 매번 의미가 새롭다. 소식이 해남 유배지에서 아들과 대화하는 내용 중에서 일부분이 유난히 눈에 들어 왔다.
"한퇴지라는 사람이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 가면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단다. 그러나 바다로 간다고 해서 반드시 큰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는 몰랐던 거야……." 그 부분을 읽는 순간 머리를 크게 한대 맞는 느낌이 들었다. 큰 고기를 잡으려고 애쓰고 있는 지금의 나를 꾸짖는 듯 했기 때문이다. 지리산 둘레길 나서며 사실 뭔가 큰 것을 잡으려고 애썼다. 비워야함에도 채우려고만 했다. 지리산 둘레길은 큰 바다와도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큰 고기를 잡으려고 애쓰는 것은 나의 허망한 욕심이다. 900년 전 동파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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