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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더/지리산 둘레길

<4일차>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지리산 둘레길-4일차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해가 져가고 발걸음 빨라져가고...

 

살다보면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그 얘기는 말미에 하겠다. 오늘도 둘레길을 나선 이후 늘 그랬듯이 동이 트고 한참이 지나서야 잠이 깼다. 그것도 강제로. 밭일을 나가야 했던 금계마을 큰집민박 한옥문 할머니께서 마음이 급했던 모양인지 자고 있던 방문을 두드리며 깨우신다. 아침밥 먹으라는 할머니의 재촉에 간신히 잠에서 깼다. 반찬이야 전라도 밥상에 비할까마는 씨락국에 뚝딱 한 공기를 비우고 10시 반에서야 4구간을 출발했다. 시작부터 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이럴 때 나는 항상 짧은 구간을 선택한다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과 휴천면 동강마을을 잇는 11km구간이다. 그래봐야 긴 구간과 2km차이다.

 

 

안내책자에는 고즈넉한 숲길과 엄천강을 따라 걷는 옛길을 통과하는 무난한 길이라고 적혀 있었다날씨는 잔뜩 흐려있어 크게 땀 흘릴 일은 없을 듯 했다. 하지만 말이 고즈넉한 숲길이지 실제로 걷다보니 땀을 많이 흘려야하는 난이도가 높은 길이었다. 식당도 많지 않아 점심도 굶을 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중간에 길을 잘못 들었다. 수풀을 헤치며 길을 개척해나갔다. 순간 겁도 났다. 어찌어찌해서 둘레길 간판을 다시 만났다. 둘레길 따라 수없이 만나는 나무간판일 뿐이데...왜 그렇게도 그때는 반갑던지. 그 때문에 1시간을 더 지체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마을?

 

발레 쫌 하는 허수아비.

 

길을 잘 못 들었지만 발은 오히려 강가에서 호강했다.

 

 

외계에서 온 감나무.

 

오늘 점심은 라면.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중간지점인 세동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다. 둘레길에서 처음 먹는 라면이다. 세동마을 감나무집 박부남 할머니께서 끓여주신 순한 스타일의 라면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3천원이다. 점심을 먹고 나니 몸이 한결 가볍다. 오후에는 다시 날씨가 좋아져 햇볕이 뜨거웠다. 아스팔트 포장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길 오른쪽 편에 커피 무료입니다라고 적힌 입간판이 보였다. 무시했다. 왜냐면 둘레길을 걷다보면 펜션이나 민박집에서 손님을 끌기 위해 그런 간판을 많이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글이 좀 많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한 잔 하세요^^ 숙박하는 집 아닙니다. 영업하는 집 아닙니다'라고 부가 설명까지 써 놓았다. 둘레길을 걸으며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커피 한 잔을 먹을 수 있도록 해 놓은 곳이었다. 주인도 없고 커피믹스와 종이컵 그리고 냉온수기 물통만 놓여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곳에 놓여 있는 커피를 한잔 타서 마셨다. 둘레길에도 이런 서비스가 있었다니...때마침 달콤한 커피 한 잔 생각났었는데 너무 감사했다. 믹스커피 공짜로 마셨을 뿐인데 솔숲을 지나는 바람까지 시원하게 느껴졌다

 

 

무료커피 준비 하신 김옥분 여사님 감사드립니다!

 

동강마을 입구의 코믹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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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에 종점인 동강마을에 도착했다. 하루를 마감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잘만한 민박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묵었던 민박집에 비해 너무 화려했다. 동강마을에서 하룻밤을 자는 계획을 접었다. 5구간인 동강마을~수철마을 구간을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해 버렸다. 중간에 가다보면 또 잘만한 마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이 구간은 12km에 불과하지만 재를 두 개나 넘어야했다. 저녁 9시가 넘어서야 도착할 것 같았다. 정도는 아니지만 결국 편법을 쓸 수 밖에 없었다. 둘레길을 벗어나 지도에 표시된 지름길을 택했다.

 

바람은 불고,

 

갈길은 꼬불꼬불 멀어서,

 

마음이 급해진 키다리 아저씨.

 

1시간쯤 걸었는데도 마을은 보이지 않고 해는 곧 질 것 같았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할 무렵 마을이 보였다. 가현마을이다. 둘레길 지도에는 표시도 안 돼 있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밭에서 일하는 분이 보였다. '수철마을로 가야하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아마도 빠른 걸음으로 2시간을 걸릴 텐데...' '그러면 이 마을에는 민박하는 곳이 없나요?' '이 마을에는 민박집이 없어요. 하지만...'

 

하룻밤을 묵은 추석호 선생님의 흙집.

 

흙집에서 키우는 개와 장닭. 장닭의 보무가 당당하다.

 

저녁상에 올릴 야채를 준비하는 추석호 선생님.

 

추석호 선생님(왼쪽)과 이 흙집의 원래 주인이신 김철용 선생님. 머리에 양파망을 쓰고 계신 이유는 깔따구 퇴치용이란다.

 

 

나와 함께 먹을 저녁 준비를 하시는 추석호 선생님. 

 

 

잠시 망설이던 그 분이 '민박하는 집은 아니지만 그냥 우리 집에서 하루 자고 가요' 돈도 안 받을 테니 자고 가라신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저녁을 함께 먹으며 얘기를 들어보니 폐암 때문에 혼자 서울에서 요양을 온 분이셨다. 올해 예순 여덟이신 추석호 선생님이다. 5곡밥과 무농약 채소에 묵은지,마늘짱아치를 반찬으로 꺼내 놓으셨다. 더군다나 박근혜 파면일 날 기념으로 담아 놓았던 자연산 더덕주 까지. 너무나 행복한 밤이다. 살다보면 때론 예상치 않은 곳에서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소박한 저녁상에.

 

감탄 스러운 맛의 박근혜 파면 기념 산더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