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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더/지리산 둘레길

<2일차> 기좀 펴고 살자

지리산 둘레길-2일차

-기좀 펴고 살자

 

늦잠을 잤다. 지리산 밑이라 지난밤은 쌀쌀했다. 보일러를 켜 놓고 잤더니 방바닥이 뜨끈해서 딱 좋았다새벽에 잠이 푹 들었던 모양이다. 짐을 챙겨서 민박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할머니께서 아침도 못 챙겼다며 곶감이랑, 호두를 비닐에 싸 주신다. 가면서 먹으라며. 눈물이 날 정도였다. 민박집을 나서 운봉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민박집 할아버지께서 트럭을 몰고 나오셨다. 운봉 읍내 2구간 출발지점까지 태워주시겠단다. 마침 읍내에 매실을 팔러 나가는 참이라며. 덕분에 아침부터 힘을 저축한 셈이다.

 

장수 민박집 할머니께서 싸주신 곶감과 호두. 장수민박이라 아들 아름이 장수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바깥어른 성이 '장'씨고, 젊었을 적 직업이 '포수'였단다 그래서 처음에는 '장포수 민박'으로 하다가 '장수 민박'이 되었다고... 

 

운봉에서 인월까지의 둘레길 2구간은 다행히 어제보다는 평이했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2구간 종점까지 와버렸다. 10Km가 채 안 되는 구간이었다. 또한 산모퉁이를 도는 구간이라 힘도 덜 들었다. 인월에서 칼국수 한 그릇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3구간은 20km가 조금 넘는 구간이다. 내친김에 반쯤 가자는 생각으로 3구간을 나섰다. 그런데 오른발 둘째 발가락이 말썽이다. 물집이 잡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오후부터 조금 이상이 있기는 했지만 오후부터는 제대로 걷는 게 힘들어졌다. 이거 참 나이 탓인가?

 

양말은 구멍나고, 발가락은 물집이 생기고....

 

이곳도 가뭄이 심각하다. 다른 지역은 비가 왔다는데 남원 쪽은 어제부터 찔끔 수준이다. 벼가 심어진 논은 최근에 다녀본 다른 지역보다는 상태가 나아보였다. 이곳은 일모작만 하는 곳이라 모내기를 일찍 한편이라 키도 많이 자랐다. 하지만 밭은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둘레길 옆 밭에 심어진 깻잎들이 죄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곳이 인사성 밝은 예향이라는 거는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제는 기좀 펴고 살자.(이 땅의 풀이 죽은 깻잎들 꼿꼿하게 기좀 펴고 자랄 수 있게 비야 좀 많이 내려다오....)

 

 

가물어서 풀이 죽은 깻잎들.

 

 

오후 6시가 넘어서니 다리에 힘이 빠졌다. 오늘은 적당히 가고 숙소를 잡기로 했다. 남원시 산내면 장항마을은 3구간의 1/3지점 쯤 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하루 묵기로 하고 민박집을 정했다. 작은 마을인데 민박집이 10곳이나 된다. 장항민박, 장수민박, 아코디언 민박...., ‘아코디언민박. 이름이 특이했다. 그래서 그곳으로 갔다. 오늘 밤에 주인장이 들려주는 아코디언 소리라도 한번 멋들어지게 들어 볼 요량으로...

 

 

 

 

장항마을. 만수네 민박은 할아버지 성함이 '만수'였다.

 

민박집을 짐을 풀고 났더니 안주인인 손윤례 할머니께서 저녁상을 준비해 놓으셨다. 반찬이 한상 가득 차려 놓으셨다.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라 나중에 드시겠다는 할머니를 설득해서 한 상에 함께 식사를 했다. 아코디언 연주하시는 어르신은 어디 가셨냐고 여쭸더니 멀리 가셨단다. 오늘은 아코디언 연주는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아코디언 민박 전경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아코디언 연주가였다.

 

아코디언 민박집 태어난지 얼마 안된 새끼 고양이. 뒤쪽에 있는 2마리는 겁이 많아 멀찍이 떨어져 있다.

 

아코디언 민박집

 

 

저녁 밥상.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 나왔다. 밤하늘에 별이 참 많다. 평상에 앉아 있는데 할머니께서 나오셔서 이 얘기 저 얘기 하신다나는 민박집 이름이 특이해서 이집을 찾았다고 얘기를 꺼냈다. 안 그래도 바깥양반이 아코디언 연주를 너무 잘 하셔서 민박집 이름도 아코디언민박이라 정하셨다고 했다. 그리고는 바깥어른이 4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하신다. 괜히 내가 죄송스러웠다. 할머니는 옛날 얘기를 덤으로 들려주셨다. 남원 운봉에서 머슴 3명 있는 집에서 자랐는데 가난한 이곳으로 시집와서 고생하셨고, 6시 내고향에 아코디언 연주하시는 바깥어른이 출연하셨고, 그 방송을 보고 여든이 넘은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 물어물어 찾아오셨고, 분당 사는 아주머니들이 하룻밤 묵고 갔는데 할머니집 고사리가 너무 맛있어 지금도 전화로 주문하고 있고...

상에 앉아 할머니께서 꺼내 놓는 이야기 보따리를 다 듣다보니 저녁 11시가 훌쩍 넘었다.

결국 오늘도 12시가 넘어서야 잠이 든다. 그러나 뭘 걱정하랴. 내일 또 늦잠을 자면 그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