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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더/작업중(作業中)

관대한 하품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려는데 딸아이가 묻는다. “아빠, 오늘 무슨 날이야?” “부처님오신 날이지...” “아 그래서 오늘 학교를 쉬는구나...” 잠이 들깬 건지 요즘 아이들이 그런 건지 참 어이가 없다. 아무튼 내 탓이다. 출근시간에 빠듯하게 나섰지만 공휴일이라 지하철 배차 간격이 너무 길다. 예상시간보다 15분이나 늦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장비를 챙겨서 부처님오신 날 법요식이 열리는 조계사로 향했다. 다행히 시작시간보다는 일찍 도착했다. 담배라도 한대 피우고 들어가려했지만 경내에 가득한 인파를 보니 법요식 행사장까지 가려면 만만찮아 보였다. 꾹 참았다. 취재용 사다리까지 챙겨서 어렵게 인파를 파고들었지만 아뿔싸 이미 행사장은 취재진으로 만원이다. 그동안 부처님오신 날 취재를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사람이 많은 적은 처음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유력 대선후보들이 법요식에 참석하기로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도대체 파고 들어갈 한 뼘의 공간조차 없다. 먼저 자리 잡은 사진기자들도 좁은 공간에서 이중삼중사중으로 대선후보들 좌석 앞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설령 그까지 운 좋게 들어간다 하더라도 끼어들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처럼 보였다. 일찍 좀 서둘러올걸...후회막심이었다. 후보들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자리는 포기해야했다. 조계사 대웅전 옆 돌계단을 올라 우회로를 선택했다. 복병은 그곳에도 있었다. 조계사 직원들이 앞을 가로막고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시작 시간은 다 되어 가고 대선후보들은 내 앞을 지나쳐 행사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조계종 종정이신 진제스님이 입장을 마치자 돌계단 길이 열렸다. 간신히 대선후보들이 보이는 곳에 사다리를 놓고 올랐다. 행사장 중앙이 아닌 왼쪽편 앞줄에 앉은 4명의 후보들의 모습이 보였다. ~~~~

 

 

 

 

 

 

 생각해보니 대선을 목전에 두고 부처님오신 날 법요식이 열리기는 역사상 처음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부처님오신 날과 선거기간이 겹쳤기 때문이다. 많은 불교 신자들이 참석하는 상징적인 행사이기에 유력 대선주자들이 이날 법요식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터.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홍준표 자유한국당, 안철수 국민의당,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가 왼쪽부터 나란히 자리에 앉아 있다.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후보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유 후보는 그 시간 대구 동화사에서 열린 법요식에 참석해 있었다. 5명의 대선후보들 중에 불교 신자는 유승민 후보뿐이다. 문재인 후보와 심상정 후보는 천주교, 홍준표 후보는 개신교, 안철수 후보는 무교다. 하지만 표에는 종교가 따로 없는 법. 4명의 후보들은 종교와 상관없이 석탄일 행사에 참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날 저녁 마지막 TV토론에서 서로를 깎아내리는 공방을 펼친 탓인지 4명의 후보들은 나란히 앉아서도 대화는 거의 없었다. 후보들은 눈을 감고 있거나 허공을 보는 등 1시간가량 진행된 법요식 동안 애써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그 중 한 후보는 졸린 듯 연신 하품을 했다. 비록 한 손으로 입을 막고는 있었지만 누구나 하품을 한 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며칠 전 JTBC 토론회에서 졸려서 오래하지 못하겠다고 했던 바로 그 분이다. 첫번째 하품은 딴 곳을 보고 있어서 순간 놓쳤다. 하지만 하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려 5번이나 넘었다. 순간을 놓친 사진기자들에게는 너무나 관대한 하품이엇다. 법요식이 끝나기도 전에 그 후보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나머지 3명의 후보는 그나마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사진기자들은 행사가 끝나면 후보들 간에 서로 악수라도 하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후보들은 행사가 끝나자 눈도 마주치지 않고 부리나케 행사장을 떠나 버렸다. 이날 참석한 4명 중에 내년 부처님오신 날 법요식에 참석할 후보가 과연 있을까? 법요식이 끝나자 행사가 진행된 경내에서는 신도들이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장면 사이로 불과 몇 분 전까지 머물렀던 후보들의 이름이 적힌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비로소 나는 1시간 동안 꼼짝없이 서 있는 자리에서 땀을 닦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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