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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다큐 세상 2008]‘은 위에 금’ 혼을 얹다
ㆍ최고의 전통 세공기술자 이정훈옹
세공조각 기능 전승자인 이정훈옹이 은장도에 우리의 전통 문양을 새겨 넣고 있다. 60여년을 고집스럽게 한 길만 걸어온 귀금속 장인의 손맛이 오롯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
60년간 귀금속 세공 한 길만을 걸어온 사람이 있다. 세공조각 기능 전승자인 이정훈옹(74)이다. 그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세공 기술자 중 최고령이자 최고 기술자로 꼽힌다. 서울 은평구 녹번동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는 그의 작업실 겸 전시실인 ‘태광 공방’을 찾았다. 3월 중순도 지났건만 그가 세들어 있는 반지하 작업실은 아직 한기가 느껴졌다. 작업실 구석에 놓여 있는 라디오에서는 철 지난 음악이 고즈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작업대 앞에서 은가락지를 만들고 있었다. 유난히 두툼하고 짙은 그의 눈썹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오직 한 길만을 걸어온 그의 고집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듯했다. 작업대에 걸려 있는 도구들은 세월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윤이 났다. 작업대 반대편에는 전통 문양이 새겨진 가락지와 비녀, 은장도 등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그의 작품들이 유리상자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전통 귀금속 공예의 맥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있는 이정훈옹. 혼이 담긴 작품 제작에 여념이 없는 그는 스무살 청년의 기세이다.(왼쪽 사진) 은가락지에 전통 문양을 새기는 작업은 정교한 손길을 필요로 한다. 은 위에 금을 얹어 모양을 내는 ‘누금기법’은 수천년을 이어온 우리의 전통 기술이다.(오른쪽 사진) |
그가 금은세공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48년. 가난을 면하기 위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시작한 일이지만 손재주가 남달랐던 그는 점차 전통 세공의 뛰어남에 매료됐다. 하지만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끊어진 세공기술을 제대로 익히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금광에서 생활하며 금을 캐는 과정과 분석법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은세공 기술로 이름이 높았던 이남재옹을 만나 기술을 전수받은 것은 그에게 행운과도 같은 일이었다. 30대 중반에는 수십명의 직원을 거느리며 세공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혼’이 담긴 예술품에 대한 열정은 그를 고독한 창작의 길로 내몰았다. 1969년에는 작품을 모아 당시 김포공항에 있던 미군부대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다. 이것이 바로 국내 최초의 보석 디자인전이었다. 봉황, 물고기 등의 전통 문양에 진주와 수정 등 보석을 현대적으로 장식한 독특한 액세서리들은 관람객들의 찬사를 받았다. 또한 그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국제 다이아몬드 창작대회’에 작품을 내놓기도 했다.
우리나라 귀금속업계의 발전을 주도하던 그가 10여년 전부터는 사라져 가던 전통 세공법을 복원하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찬란했던 전통 세공기술의 맥을 이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흔적만 겨우 남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나씩 전통 기술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특히 ‘누금기법’ 은 위에 금을 얹어 모양을 내는 붙임 기술로 수천년을 이어온 우리의 전통 기법이다.
“요즘 사람들은 전통이라는 말만 꺼내도 고개를 돌리잖아. 이렇게 만들어 놔야 찾는 사람도 별로 없고, 만드는 과정은 또 얼마나 힘들어. 그러니 누가 이걸 하려고 하겠어. 그래도 누군가는 지켜야 하니까 별 수 있어? 현대 작품은 나 말고도 할 사람이 많지만 이건 꼭 내가 해야 하는 일이지. 평생 이 일 하면서 안 해본 거 없는 내가 당연히 해야지, 허허.” 은가락지에 좁쌀만한 박쥐 문양을 새기는 그의 손놀림은 잘 닦아 놓은 신작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경쾌했다.
<사진·글 |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입력시간: 2008.03.23 17:06 | 기사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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