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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기사] [포토다큐]‘마지막 풍경’으로 서있는 37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9091654361


[포토다큐]‘마지막 풍경’으로 서있는 37년

▶‘가장 오래된’ 서울 회현 시범아파트

남산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회현시범아파트 전경.


음식에도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원조집이 있듯이 아파트도 ‘원조집’이 있을까. 광복 이후 우리 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1958년에 세워진 서울 성북구의 종암아파트. 4층짜리 건물 4개동에 불과했지만 종암아파트는 아파트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종암아파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올해로 37년이 되는 중구 회현동의 회현시범아파트는 현존하는 서울 최고(最古)의 아파트다. 초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낡은 시범아파트가 도심 속 흉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곳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서민들에게는 평생 터전이 되었던 삶의 보금자리로 아직도 굳건하게 남아 있다.


원조는 아니지만 ‘시범’이 되는 아파트는 아직 서울에 한군데 남아 있다. 중구 회현동의 회현제2시범아파트가 바로 그 곳이다. 준공된 지 올해로 37년이 되는 회현시범아파트는 현존하는 서울 최고(最古)의 아파트. 하지만 초고층 ‘명품’아파트가 거대한 숲을 만들고 있는 서울에서 회현시범아파트 역시 몇 년 후에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될 듯 하다.

회현동 시범아파트 안쪽 화단에 묻어져 있는 장독대 풍경이 이채롭다. 오래된 장독에는 김치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추억과 시간과 역사가 담겨 있는 듯 하다.


남대문 시장에서 남산N타워를 바라보며 좁은 언덕길을 오르기를 20여 분. 마치 70년대를 재현하는 거대한 영화 세트장처럼 생긴 색바랜 아파트가 가쁜 숨을 맞이한다. 아파트 입구에 적혀 있는 ‘회현 시범 아파트’라는 팻말이 옛 명성을 자랑이라도 하듯 큼지막하게 걸려 있다. 시범아파트는 1970년 날림공사로 인해서 맥없이 무너져 내린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직후, 당시 서울시장이 이 곳을 본보기로 삼아 튼튼하게 지으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시범아파트의 터줏대감인 김금래할머니(75)가 7층 구름다리 입구에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10층짜리 건물인데도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하지만 아파트 6층과 7층에는 언덕길과 연결된 ‘구름 다리’가 2개나 있어 어렵지 않게 아파트를 오르내릴 수 있게돼 있다. ‘ㄷ’자 모양의 아파트 안쪽 마당은 가장 인상적인 풍경. 계단을 따라 이어진 언덕 화단에는 100여 개의 장독이 고개만 내민 채로 사이좋게 묻어져 있다. 시범아파트에서 30년을 살았다는 김금래할머니(75)가 냉장고가 없던 시절부터 묻어 놓은 장독이라며 옛 얘기를 꺼내 놓는다. “공용 화단에 하나둘 묻기 시작한 장독을 두고 김장김치를 꺼내 먹는 겨울철이면 서로 자기 장독이라며 이웃끼리 아침마다 다툼도 참 많았었지. 하지만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지금은 장독도 속이 많이 비었고, 그나마 싸울 이웃도 이제는 많이 떠나 버렸으니, 쯧쯧쯧.”

시범아파트에서 30년 이상을 살아온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 축대 앞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할머니들은 아파트가 헐리는 것을 한결같이 아쉬워했다.


오랫동안 삶의 터전을 일궈온 주민들에게 몇 해 전부터 나오고 있는 개발 계획이 반가운 소식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37년 동안 353세대의 서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던 시범아파트. 지난해부터 빈집이 부쩍 늘기 시작해 85세대가 이미 집을 비운 상태다. 입주때부터 살아온 아파트 터줏대감 강옥남할머니(87)가 취재를 마치고 떠나는 기자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읊조렸다. “나 죽기 전까지는 허물지 말았으면 좋겠건만. ‘든 사람은 몰라도 난사람은 안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지. 많이 떠나서 섭섭하기는 하지만 나는 정들어서 절대 이 곳을 못 떠나. 여기는 단순히 사람 사는 곳만은 아니거든...”



〈사진·글/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입력시간: 2007.09.09 16:54기사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