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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더/풍경

우포늪에 서다

 



당신은 우포늪에서 무얼 보고 가셨습니까? 혹시 아마존 밀림 같은 늪지대를 상상하고 가셨다가 실망한 채 돌아가진 않으셨습니까? 언뜻 보면 저수지 같아 보이는 평범한 그 모습에 그러실 수도 있었겠네요.

그래도 조금 부지런한 분이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물안개의 풍경을 놓치지 않으셨겠지요. 우포늪의 물안개는 1억4천만년전 물을 품고 가라앉은 땅이 수면위로 토해내는 신비스런 숨결입니다. 희뿌연 막이 드리워진 새벽의 원시늪. 그 깊숙한 바닥엔 태고의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당신은 우포늪에서 무얼 듣고 가셨습니까? 시끄러운 도시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뭘 또 들어야 하냐고요? 이곳에선 귀를 활짝 여셔야 합니다. 풀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벌들이 꽃잎에서 웽웽거리는 소리, 자맥질하는 물고기 첨벙 소리, 이름 모를 철새의 울음소리…. 그리고 고요한 자연의 말 없는 위로의 소리.

우포에는 늪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논갈이 하는 트랙터를 아장아장 따라다니며 곤충을 쪼아먹는 귀여운 황로가 있고, 아직 눈도 뜨지 못한 둥지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어미뱁새가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초등학교 문구점에서는 더 이상 잠자리채를 팔지 않게 됐지만, 이곳에는 지천이 잠자리와 나비떼입니다. 수면위엔 푸른 융단이 깔렸습니다. 사라져가는 가시연이 2m 가까이 되는 커다란 잎을 뽐내고, 노랑어리연의 샛노란 꽃도 수줍게 머리를 내밉니다. 그리고…. 그곳에 사람이 있습니다. 나룻배에 올라선 초로의 노인이 푸른 융단을 헤쳐가며 물고기와 고둥을 줍는 고즈넉한 풍경. 우포늪은 한때 2백만평에 달하던 자신의 몸을 농경지로 만들겠다고 3분의 1로 토막낸 인간마저도 그렇게 품안에 보듬어 줍니다.

그래서인가요. 이곳은 일출과 일몰의 햇살마저도 특별합니다. 태양이 어디에나 공평하단 말은 거짓인가 봅니다. 하긴 그렇겠지요. 꽃과 수풀과 새와 사람이 이렇게 아름답게 어우러져 살아가는데. 태양마저 편애할 수밖에요. 갈대숲의 낭만이 노을 속에 뉘엿뉘엿 져가고, 백로의 흰 깃털도 노란 석양빛에 물들어 갑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촌부의 나룻배는 반짝이는 수면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우포늪을 방문하셨던 당신. 천의 얼굴을 가진 우포늪을 제대로 보고 들으셨습니까? 그 은밀한 생명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셨다면, 수고스럽겠지만 한번 더 먼걸음 하셔야겠습니다.
(이 글은 함께 취재갔던 후배 정유진 기자가 쓴 우포늪 기사입니다.제가
찍은 사진과는 비교가 안되는 정말 훌륭한 기사였습니다.)

항상 가고 싶었던 우포늪을 지난 6월 초 드디어 다녀왔습니다. 한번은 근처에 출장을 갔다가 우포늪이 너무 보고 싶어 잠시 들렸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갔지만 한컷도 찍지 않고 그냥 왔습니다. 우포늪은 잠시 들려 대충 찍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그로부터 1년후 다녀 온 우포늪입니다. 시기가 다소 빨라 "지금쯤이(7월말 8월초)었다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텐데"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1만년을 넘는 세월동안 우포늪은 늘 우리 곁에 있어 왔습니다. 제가 담아 온 사진이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우포늪은 다음에 또 들려야겠다는 기대를 저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린호프 612카메라, 58mm렌즈, 벨비아 감도 50필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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