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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더/우리 곁의 난민

에티오피아의 눈물<2>

에티오피아 난민들의 맏형 카사훈(Kassahun)

 

 

카사훈은 내가 만난 에티오피아 난민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올해 47살이다. 그를 처음 만난 날 우린 저녁을 함께 했다. 이왕이면 맛있는 저녁을 대접하려고 회사 앞 맛집 중에서 주꾸미 구이집을 일부러 정했다. 이집은 내가 이십년 넘게 다닌 맛집이고 누구나 좋아할 만한 메뉴였다. 그런데 막상 카사훈은 주꾸미를 먹지 못했다. 아니 해산물 자체를 먹지 못했다. 아뿔사... 에티오피아가 바다를 끼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첫만남을 미안함으로 시작한 셈이 되었다.

 

지난 8일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인천으로 향했다. 그는 부평에 살고 있다. 미리 알려준 주소를 취재차량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이 안내해준 목적지는 한 유원지 초입의 마을이었다. 도저히 카사훈이 살고 있는 동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카사훈에게 전화를 해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카사훈이 자기 집 대문까지 나가서 다시 알려준 주소는 번지가 전혀 다른 주소였다. 한국 주소에 익숙지 않은 카사훈이 도로명주소와 지번주소를 혼동해 알려준 것이었다. 처음 도착한 곳에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카사훈이 살고 있는 집은 다가구주택 반지하방이었다. 거실 겸 부엌과 작은 방 하나가 전부였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가 25만원이라고 카사훈은 나중에 알려줬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마침 카사훈이 어리이집에 갔던 딸을 데리고 와야 하는 시간이었다. 카사훈은 나를 집으로 안내한 후 딸을 데려오기 위해 다시 나갔다. 잠시 후 카사훈은 3살인 딸 지포라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지포라는 나이에 비해 몸집이 컸다. 포동포동한 얼굴에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연신 달려들었다.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만지며 카메라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카사훈이 내가 사들고 간 수박으로 지포라의 관심을 돌렸다. 거실에는 낡은 소파가 놓여 있었고 싱크대에는 그릇 몇 개만 딸랑 놓여 있었다. 카사훈의 부인 아디스(가명·32)는 저녁 6시가 조금 넘어서 집으로 들어왔다. 일주일 전부터 근처 생선가공공장에 취직해 일을 다닌다고 했다. 아디스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저녁부터 준비했다. 아디스가 준비한 저녁은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주식인 ‘인제라’였다. 테프(Teff)라는 곡식을 갈아 발효시켜 빈대떡같이 얇게 구워 소스를 발라 손으로 먹는 음식이었다. 배가 고팠다. 주는 대로 먹다보니 금세 배가 불러왔다.

 

카사훈이 딸 지포라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오고 있다.

 

올해 3살인 지포라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난민 2세인 셈이다.

 

렌즈 앞을 떠나지 않는 지포라.

 

지포라가 내가 사간 수박을 장남감 삼아 놀고 있다. 지포라가 카메라를 너무 신기해하고 렌즈 바로 앞까지 밀착 마크하는 바람에 이렇게라도 관심을 딴 곳으로 돌려야 셔터라도 누를수 있었다.

 

지포라는 스마트폰 삼매경! 카사훈은 지포라 삼매경!

 

 

 

카사훈씨 부인 아디스가 준비한 저녁이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인 '인제라'다. 우리의 빈대떡 같이 생겼지만 맛은 전혀 다르다.

 

 

저녁을 먹은 후 카사훈은 한국으로 오게 된 과정을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5남매 중 장남인 카사훈은 대학에서 선박과 관련된 전공을 공부했다. 화물선 선원이 되었고 세계 곳곳을 다녔다. 한국도 여러 번 왔었다고 했다. 화물선 선원으로 일하면서도 에티오피아 정부의 독재와 인권탄압에 맞서 반정부 활동을 틈틈이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결국 선장이 알게 되었고, 카사훈은 본국으로 돌아가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것을 걱정했다. 카사훈은 화물선이 대만을 거쳐 부산항에 입항했을 때 망명을 실행했다. 한국에 남아 생명의 위협으로부터는 탈출했지만 막상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난민지원센터인 ‘피난처’에서 숙식을 하며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난민신청을 했다. 하지만 난민자격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절차와 방법은 까다로웠다. 언어장벽과도 싸워야했다. 난민인정 심사와 기각, 재인정 심사를 거쳐 지루한 법정 소송까지 이어졌다.

 

난민인정을 받기까지 3년 동안 카사훈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다. 택배일도 돕고, 공사장에 나가 막노동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 에티오피아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온 지금의 아내 아디스를 만나 결혼했다. 딸 지포라가 태어났고 작은 월세 방이지만 행복했다. 카사훈은 지난 2015년 법원에서 승소해 난민인정을 받았다. F2비자(거주비자)를 받은 카사훈은 그때부터 취업이 자유로웠다. 또한 더 이상 거주지를 출입국사무소에 따로 신고하지 않아도 되었다. 강제로 한국에서 쫓겨날 것을 더 이상 걱정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늘 일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좋은 일거리는 난민에게 여전히 장벽이 높았다. 지포라가 태어나고부터는 기저귀와 분유 값을 대느라 생활이 더 빠듯해졌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병원도 마음대로 갈 수 없다. 난민들에게 의료혜택을 주는 곳은 서울 적십자병원 희망진로센터가 유일하다. 하지만 그곳도 주말에는 문을 닫는다. 어린 아이가 어찌 평일에만 아플 수 있을까. 그것도 병원이 문을 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9시간 동안만.

 

 

 

 

3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카사훈의 어린 딸 지포라가 현관문까지 따라 나오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문을 나서며 카사훈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카사훈은 에티오피아에 진정한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어린 딸 지포라가 한국에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골목길을 돌아 나서며 나는 그의 꿈이 이뤄지길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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