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폴더/우리 곁의 난민

에티오피아의 눈물<1>

(한국에 체류 중인 에티오피아 난민들에 대한 취재는 우연한 계기로 시작되었다. 지난달 5월 22일 청와대 인근 청운효자동 주민센터앞에서 기초생활보장수급자 부양의무자기준 폐지촉구 기자회견이 있었다. 기자회견 취재를 마치고 회사를 돌아가는 길에 맞은편 도로에서 또다른 기자회견이 열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단 한명의 기자도 보이지 않았다. 주최측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회견이 열리고 있었지만 기자들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에티오피아 애국단체 'Ginbot7'의 일원이라고 밝힌 난민 20여명이 한글로 적힌 손피켓을 들고 청와대 방향을 향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이들의 집회를 보호하고 감시하는 경찰들만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에티오피아 난민의 존재와 규모를 알지 못했다. 취재한 사진을 몇 장 인터넷 웹기사로 마감했다. '우리나라에 에티오피아 난민들이 있었나?'로 시작된 궁금점이 에티오피아 난민 취재의 시발점이 되었다. 다행히도 그날 집회 현장에 나와 있던 동작경찰서 외사과 이남희 경사의 도움을 받아 에티오피아 난민 취재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다행히도 이남희 경사는 애정과 애착을 가지고 수년째 난민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번 취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취재 내내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남희 경사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에티오피아 난민모임 회원들이 지난 5월 22일 서울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인근에서 미국의 에티오피아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중단과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난민보호를 요청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에티오피아 난민모임 회원들이 지난 5월 22일 서울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인근에서 미국의 에티오피아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중단과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난민보호를 요청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서울 동작경찰서 이남희 경사(왼쪽)가 지난 6월 11일 에티오피아 모델대회 출신 난민인 디나(오른쪽)와의 인터뷰 취재에서 통역을 맡아주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페이사 릴레사는 지난해 리우올림픽 마라톤에서 2위로 결승점을 통과하며 두 팔을 엇갈려 엑스(X)자를 그려 보이는 세레모니를 펼쳤다. 릴레사는 “에티오피아 정부의 폭력적인 진압을 반대하는 의미다. 평화적인 시위를 펼치는 반정부 시위대를 지지한다”고 시상식에서 말했다. 올림픽이 끝났지만 릴레사는 결국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에티오피아 반정부 시위 배경은 부족간 갈등과 내전에 있다. 지난 1991년 에티오피아국민혁명민주전선(EDRF)이 내전 끝에 멩기스투 정권을 몰아내면서 지금의 에티오피아 정부가 탄생했다. 에티오피아국민혁명민주전선은 외형적으로는 여러 부족이 참여하는 형태다. 하지만 주도권은 북부 티그레족 반군 단체였던 티그레국민해방전선(TPLF)이 쥐고 있다. 지난 2015년 총선 이후에는 야당의원이 단 1명도 없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부족인 오로모족과 80여개 부족은 수년째 이에 반발해 정치적 경제적 차별 및 인권탄압을 비난하며 반정부 시위를 펼치고 있다. 에티오피아 정부는 이런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반정부 인사들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해 감금하고 있다. 한국에 온 에티오피아 난민들은 이런 정치적 박해를 피해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에티오피아 정부의 인권탄압과 정치적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건너온 에티오피아 난민은 약 350명에서 4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들중 일부인 20여명을 만나서 인터뷰 했다.

 

세계난민의 날인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앞에서 에티오피아난민 20여 명이 기자회견을 열고 에티오피아정부의 인권탄압에 항의하는 의미로 에티오피아 마라톤 선수 페이사 릴레사가 리우올림픽 결승점을 통과하며 보여준 X자 세레모니를 펼치고 있다.

 


지난 6월 11일(일요일)오후 2시. 서울 상도동에 있는 난민지원센터 ‘피난처’에 20여명의 에티오피아 난민들이 모였다.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정기 모임 이었다. 이들은 에티오피아의 자유와 정의를 위해 반정부 활동을 펼치는 ‘Ginbot7’의 회원들이다. 에티오피아의 현실을 한국에 알리는 활동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지난 11일 에티오피아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는 'Ginbot7’의 한국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총 15명이지만 세명이 이날 불참했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카사훈, 야레드, 마세레트, 헤노크, 아디스알렘, 기자쵸, 요나스, 타리쿠, 요다노스, 마르타, 아브라함, 압바이네.)

 

 

카사훈씨(47)와 타리쿠(33)씨는 이 단체 소속 한국 난민들의 리더를 맡고 있다. 두 사람은 에티오피아 정부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지난 2012년 한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난민자격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절차와 방법은 까다로웠다. 언어장벽과도 싸워야했다.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난민지원센터인 피난처와 무료법률지원 변호사의 도움에 의지해야 했다. 난민인정 심사와 기각, 재인정 심사를 거쳐 지루한 법정 소송까지 이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입수한 에티오피아에서의 활동자료 덕분에 지난 2015년에서야 난민인정을 받았다. 꼬박 3년이 걸렸다. “강제로 쫓겨나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그때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카사훈(왼쪽)과 타리쿠가 지난 9일 저녁 인천 부평 간석오거리역 근처 카사훈의 집 쇼파에 앉아 서로 얘기를 하고 있다.

 

 

7년째 난민인정 심사와 소송을 진행 중인 야레드씨(39)의 부친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야레드씨는 2011년 정부 초청행사로 부친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방문 일정이 끝났지만 반정부 시위를 해왔던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야레드씨는 자신 때문에 고국에 있던 여동생이 체포되어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나중에서야 접했다. 가슴이 아팠다. 에티오피아에 남아 있던 부인 아디스알렘씨(29)는 2년 전 남편이 있는 한국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10살 아들은 결국 고국에 두고 올 수 밖에 없었다. 부부는 경기도 포천에 둥지를 틀었다. 1평 남짓한 월세 방이었지만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아서 행복했다. 막노동과 야간 공장 일을 하며 생계를 해결했다. 그러다 한 달 전쯤 부인 아디스알렘씨가 취업비자 없이 일을 하다가 출입국사무소 단속에 걸리고 말았다. 일주일 동안 갇혀 조사를 받아야했다. 출입국사무소는 그에게 벌금 100만원을 부과했다. 하지만 부부는 저축해 놓은 돈이 한 푼도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였다. 소식을 접한 동료 난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벌금을 대신 내주었다. 그렇지만 아디스알렘씨는 난민신청자에게 주는 G1비자를 결국 출입국사무소에 빼앗겨야 했다. G1비자가 없이는 난민인정 재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생계를 위한 일마저 할 수가 없다. “한국에 온 대다수의 난민들은 목숨을 걸고 고국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출입국사무소에서 열리는 난민심사 인터뷰 시간은 단지 10분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동안 어찌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야레드(오른쪽)와 그의 부인 아디스알렘이 지나 6월 11일 서울 상도동 난민지원센터 '피난처' 앞에서 함께 포즈를 취해 주었다.

 


 난민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 무관심속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난민지원센터 ‘피난처’의 오은정 간사는 “난민들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치와 신념을 위해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을 택한 이들이 난민인정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 하지만 언어소통과 우리의 인식부족으로 현실의 벽에 부딪치고 맙니다. 난민들의 인권을 위한 구체적인 메뉴얼과 제도적 장치가 이제는 마련되어야만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지난 20일은 UN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이었다. 난민은 정치·종교적 박해를 피해 삶의 터전을 등지고 떠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새 세계로도 진입하기가 어렵다. 집, 마을, 국가는 물론 인간관계마저 잃었다. 그들은 경계 밖에서 대기 상태에 머물며 문이 열리기만을 학수고대한다. 한국은 난민신청을 받기 시작한 1994년부터 지난해까지 2만2792명이 난민신청을 받았다. 하지만 인정자는 3%인 672명에 불과했다. 세계 난민인정률은 38%다.

 

인터뷰를 마친 후 피난처 앞마당에서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한번은 내가 찍고 한번은 이남희 경사가 카메라를 맡았다.

 

 

 

카사훈의 3살난 딸 '지포라'. 부평의 월세방에서 카사훈을 취재하는 3시간 동안 지포라는 내 카메라 앵글 앞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호기심과 친근함으로 다가왔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지포라는 울음을 터뜨리며 아쉬워했다.

 

 

 

 

 

 

 

 

 

 

'나의 폴더 > 우리 곁의 난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티오피아의 눈물<6>  (0) 2017.07.01
에티오피아의 눈물<5>  (0) 2017.07.01
에티오피아의 눈물<4>  (0) 2017.06.28
에티오피아의 눈물<3>  (0) 2017.06.27
에티오피아의 눈물<2>  (0) 2017.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