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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기사] [피플]‘장군의 손자’는 트럭운전사 허 블라디슬라브

출처 : 경향신문


[피플]‘장군의 손자’는 트럭운전사 허 블라디슬라브


‘조국’(祖國). 이 땅의 우리보다 해외에 사는 한민족의 가슴에 더욱 진하게 울리는 단어이다. 조국 땅을 한 번 밟아보지 못한 동포들에겐 더 그렇다. 때론 태극기만 보거나 애국가만 듣더라도 눈가에 물기가 비친다.

 

키르기스스탄에 살고 있는 허 블라디슬라브(54)에게도 조국은 가슴에 박인 ‘옹이’같다. 단지 한민족이란 이유로 3대가 고난을 받았지만 한민족의 후예란 사실이 그에겐 자랑스러운 훈장이다.

그는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1854~1908)의 손자다. 구한말 항일 의병활동을 하다 순국한 허위 선생을 두고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는 추모했다.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만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얼마전 키르기스스탄의 마나스(Manas)공항에서 만난 그는 책에서 본 왕산 선생을 영락없이 빼닮았다. 붉은 새벽노을에 비친 그의 젖은 눈동자. 독립투사의 후손답게 거센 세파를 이겨온 강단이 보였다. 우리말은 어눌했지만 또박또박했다.

금광 발굴에 참여하는 지질학자였지만 지금은 2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잃고 트럭운전을 한다. 비쉬켁 시내에 있는 그의 아파트는 철거전 서울 청계천의 아파트보다 더 낡아 보였다. 아파트가 지은 지 오래되어 보인다는 말에 빙긋이 웃었다. 10평도 채 안되는 아파트는 생활의 군색함을 숨기지 못했다. 가재도구로 가득 차 있어 한 사람이 들어서기에 벅차 보이는 부엌. 부인이 차를 준비해 왔다. 홍차를 들고 거실로 들어 온 그의 부인은 러시아인. 놀라는 눈빛에 그는 대뜸 부인 자랑을 늘어 놓았다. “집사람이 이번에 김치를 10포기나 담갔는데 아들 녀석이 너무 맛있다고 때마다 먹는 바람에 또 담가야 할 지경입니다.”

차를 함께 마시던 거실 벽에 한글을 가득 적어 놓은 달력의 뒷면이 액자처럼 걸려 있다. ‘공주병’ ‘왕자병’ ‘순국’ ‘약속하다’ ‘고향’이란 단어들이 눈에 먼저 들어 왔다. 우리글을 한시라도 잊지 않기 위해 그가 적어 놓은 것이다. 요즘은 시내에 있는 한국문화원에 틈틈이 다니며 둘째아들과 함께 한글을 배우고 있단다.

언제부터 키르기스스탄에 살게 되었을까?

항일운동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일본의 압박에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9살때 만주로 쫓기듯 도망쳤다고 했다. 만주에서 연해주로 연해주에서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바람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다 고려인 어머니와 결혼해 키르기스스탄에 정착했다. 그가 19살 되던 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중앙아시아의 한민족은 바람처럼 살아왔다. 일제의 수탈과 압박을 피해 중앙아시아까지 떠밀려온 우리 민족의 후예들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졌고, 다시 바람처럼 돌아오고 있다.

얼굴도 본적 없는 할아버지를 혹시라도 원망한 적은 없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대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너의 할아버지는 항일운동을 펼친 큰 장군이셨다. 너도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장군이 되어야 한다.’

허씨는 자신의 이름보다 의병장 허위의 손자라고 불리는 것이 더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하나 꺼내 들었다. 수첩에는 할아버지에 대한 자료가 한글로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수첩을 차례로 넘기며 그는 더 늦기 전에 할아버지의 고향에 꼭 가보겠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조국에서 훈장까지 추서 받고 고향인 대구에 동상까지 세워졌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애통하다고 했다.

다행히 그 사정을 전해들은 다큐멘터리 감독 윤덕호씨의 도움으로 오는 7월 한국에 올 수 있게 됐다.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고향땅을 밟아 보고 싶습니다. 할아버지의 동상과 묘소 앞에서 굵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감격스러워 하는 꿈까지 꿉니다.”

그의 아버지도 평생 한국에 가기를 원했지만 결국 꿈을 이루진 못했다. 결국 아버지의 넋은 바람이 되어 ‘바람의 땅’ 중앙아시아를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조국에서 찾아온 나를 현관에서 떠나보내며 그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할아버지의 업적이 적힌 색바랜 수첩을 보물처럼 주머니에 다시 집어 넣었다.

하룻동안의 짧은 만남. 그와 며칠을 같이 보낸 듯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미국, 일본 교포는 재미동포, 재일교포라 부르고 러시아, 중국, 중앙아시아에 사는 교포는 고려인, 조선족이라고 하니 죽어서도 유랑할 수밖에요.”

광복 60년이 됐지만 동포란 이름조차 얻지 못하고 고려인으로 사는 중앙아시아의 한인들. 그들이 조국을 향해 외치는 눈물편지에 마른 피가 배어있다.

〈키르기스스탄|사진·글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5년 06월 26일 16: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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