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가 있는 해남 두륜산은 ‘차의 성지’인 일지암을 품고 있습니다. 일지암은 다선(茶仙)으로 알려진 초의선사(1786~1866년)가 머물렀던 곳. 고려 이후 맥이 끊겼던 한국 차를 연구하고 ‘차와 선이 둘이 아니다’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제창하며 ‘동다송’과 ‘다신전’ 등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지금 일지암에는 여연스님(58)이 살고 있습니다. 초의를 좇아 30년 넘게 차만 연구한 차 전문가입니다. 바야흐로 차의 계절, 어떤 차를 마시고 어떻게 차를 마셔야 하는지 스님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오지말라는 만류를 무시하고 무작정 일지암으로 향했습니다.
꼬박 6시간을 달려 도착한 대흥사. 사찰 뒤로 꼬불꼬불한 산길을 30분쯤 헤치고 올라가니 일지암이 보입니다. 차의 성지로 알려졌지만 단출합니다. 암자 앞마당에는 꽃을 품은 동백나무와 자그마한 차밭이 객을 맞이합니다. 여연스님과 통화하니 보성에서 사흘째 찻잎을 돌보는 중이랍니다. “귀찮응께 오지 말라니까”라며 반기는 기색이 아니지만 “오후 6시까지 기다리셔. 왔으니 만나고는 가야지” 하고 말해주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여연스님과 차를 나눴습니다. 스님이 직접 만든 녹차의 향기와 담백함에 머리가 맑아집니다. 쑥떡 한입 베어무니 입안에 봄 냄새가 물씬합니다. 여연스님은 차에 대한 잘못된 상식부터 짚어냈습니다. “우전차가 최고라는 말은 ‘다신전’에 적혀있긴 하지만 다신전 또한 ‘만보전서’란 중국 차 백과사전을 필사해서 옮긴 것이지. 하물며 제주와 보성의 기후도 다른데. 우리나라에선 5월5일 입하무렵에 딴 녹차가 더 맛있어요”.
“좋은 차는 어떻게 고를까요”. “좋은 차는 입자의 크기가 고르고 익은 상태가 적당해야해요. 색깔은 녹취색, 향은 어린애 젓비린내, 맛은 감윤(달고 윤기있는)해야죠. 하지만 제일 좋은 차는 자기 입맛에 맞는 차야.”
“다도란 무엇일까요”. “다도는 생활이죠. 일본은 밥 따로 차 따로 마신다면, 우리는 밥 먹고 물 먹는 게 차야”. 초의선사는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며 그 잘 끓인 물로 좋은 차를 적절히 조합하여 마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이 다도라고 말했습니다. 일맥상통했습니다.
몇마디 나눈 것 같지도 않은 데 밤이 깊었습니다. 초가를 나서니 달이 휘영청 암자를 감쌉니다. 돌아서기 아쉽지만 작별의 시간입니다. 스님은 떠나는 기자를 보며 한마디 던집니다.
“관광하러 다니지? 관광은 빛을 보는 것, 즉 정신을 보는 것이야. 다도 역시 정신을 마시는 겁니다. 차 마시면서 정신이 산란하고 욕심이 가득하다면 다도가 아니지. 티백녹차를 마셔도 마음만 올곧으면 되는 거예요.”
‘첫째 잔은 목구멍과 입술 적시고/둘째 잔은 외로운 번민 씻어주네/셋째 잔은 메마른 창자 찾나니/생각나는 글자가 오천 권이나 되고/넷째 잔은 가벼운 땀 솟아 평생의 불평 모두 털구멍으로 흩어지네/다섯째 잔은 기골이 맑아지고/여섯째 잔만에 선령과 통하였다네/일곱째 잔은 채 마시지도 않았건만/느끼노니 두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이 솔솔 일어나네.’
당나라 시인 노동의 다가(茶歌)가 생각나는 계절입니다.
〈해남|글 김준일기자 anti@kyunghyang.com〉
〈사진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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