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포토다큐를 정리하다가...
<1>설앞둔 고향마을(2007년 2월 12일)
넉넉한 악양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 상신흥마을. 악양에서 가장 높은 마을인 이곳을 사람들은 `땅번지'라고 부른다. 소설 `토지'의 무대로 등장하는 평사리와는 동서로 마주보는 언덕 위에 있다. 높은 산을 등지고 있는 땅번지는 그래서 다른 곳보다 해가 늦게 든다. 잘 맞춰진 알람시계처럼 수탉이 홰를 치며 `꼬끼오~'하고 목청껏 외치고 나면 동네 굴뚝마다 밥 짓는 연기가 하나 둘 피어오른다.
땅번지에서 5대째 살고 있는 김영호 할아버지는 아침밥을 먹자마자 낫과 지게를 챙겨서 사립문을 나선다. 수도꼭지만 틀면 언제든 온수가 콸콸 쏟아지는 편한 세상이지만 땅번지 사람들은 아직도 나무로 구들장을 달궈 난방을 한다. 여든을 넘긴 나이지만 할아버지는 농번기인 겨울에는 어김없이 지게를 메고 땔감을 구하러 산으로 향한다. 더군다나 설을 며칠 앞둔 지금은 겨울 중 가장 바쁠 때다. 설에 찾아올 자식들과 손자들을 생각하면 장작을 쌓아둔 마당이 너무 휑해 보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야 땔감을 지게에 가득 싫고 파릇파릇한 보리가 어린 고개를 살포시 내밀고 있는 논둑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 왔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할아버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지만 장미 담배를 물고 있는 주름진 입가에는 한껏 웃음이 묻어나고 있었다.
김 할아버지와 돌담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는 이다순 할머니(74)는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은 마당에서 설에 쓸 쌀을 키로 까불고 있었다. 꽃무늬 몸뻬 바지를 입고 챙이질을 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개가 핥아 놓은 죽사발 맨쿠로 잘 생긴 영감이 있었는데 먼저 가부리고 말았는기라...” “청춘이 눈 깜짝라 사이제. 늙은 것이 남의 일 같더마는 어느새 하나씩 가부리고. 그래도 우짜노 묵고 살라 카이...” 힘을 받은 할머니의 챙이질에 키를 떠난 쭉정이와 티끌이 허공에서 춤을 추며 맥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짧은 겨울해가 악양 들판을 지나 섬진강 너머 광양 백운산 머리에 떨어질 무렵 땅번지에도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금실 좋기로 소문난 살구나무집 서금순(83) 할머니는 서둘러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핀다. 사랑방에 누워있는 김홍우(87) 할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하다. 18살에 시집와 5남매를 낳고 65년을 함께 살았다고 한다. “핵교도 제대로 몬 갤차 놓은 게 자식들한테 제일 미안체...” “그래도 명절 때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자식들이 그리 고마운기라...”
<2>오지마을 이야기-경북 성주 작은동 마을(2007년 6월 4일)
아련한 추억의 모퉁이를 돌아 시골버스가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 산길을 달려온다. 버스가 향하는 곳은 작은동(鵲隱洞)마을. 강원도 오지마을도 울고 간다는 작은동 마을은 경북 성주군의 하늘아래 첫동네다. 거뫼, 삼거리, 덕골, 개티, 배티.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다섯 부락이 하늘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한때 백여 가구가 넘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절반으로 줄었다. 젊은이들이 모두 도회지로 떠난 마을에는 노인들만 남아 있다.
모내기가 한창인 작은동 마을. “저수지 물을 댈 수 있는 아랫동네는 모내기가 끝이 났는디 비가 선낫바께 안온 윗동네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째” 환갑을 갓 넘긴 임용덕(61)씨는 노인들이 대부분인 마을에서 힘깨나 쓰는 젊은 축에 속한다. 도시에서 중장비 기사 일을 하던 임씨는 10년 전 마을 저수지 공사를 하러 왔다가 조용한 마을에 반해서 눌러 앉았다고 한다. 윗동네 거뫼마을 임여자(66) 할머니는 마을 유명인사다. 지난해 텔레비전에 얼굴이 나오고부터는 다른 마을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던 기자에게 할머니가 한마디 던진다. “젊은이 어데서 왔노? 늙은 할매들만 있는데 찍을게 뭐있따꼬. 날도 더분데 고생할 것도 움따.” 할머니는 한바탕 너털웃음을 지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부부싸움을 해도 말길 사람이 움따. 다들 먼디 살아서 싸우는 소리가 듣기지도 안하재. 그래도 우짤기고, 싸울 영감이라도 있응께 심심치 않아 좋은 기라...”
성주군에서 유일하게 비포장 길로 버스가 다니는 작은동 마을. 하루에 두 번 마을로 들어오는 시골버스는 마을 노인들이 세상으로 나가는 유일한 수단이다. 꼬불꼬불 산길을 덜컹덜컹 뽀얀 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시골버스의 모습이 도시에서 온 기자에게는 낭만적으로 보였지만 산골마을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겨울나무처럼 앙상한 노인들에게는 불편한 생활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3>추억의 시골 이발관 (2007년 9월 3일)
<가위소리만 남은 추억의 시골 이발관>
집집마다 `바리깡' 하나쯤은 있었던 어린 시절. 동네 이발관 육중한 의자 팔걸이에 널빤지 깔고 앉아 머리를 자르는 것은 호사스러운 일이었다. 수세미로 머리를 박박 문질러 댈 때면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느라 눈물 찔끔 흘린 적도 있지만 이발사 아저씨의 바리깡 솜씨는 어머니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었다.
읍내에 뚫린 신작로보다 더 반듯하게 머리를 잘라주던 어린시절 그 이발관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을까. 무뎌진 바리깡 날 때문에 머리카락이 뜯겨도 소리 내어 울지 못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오래된 시골 이발관을 찾았다. 갯내음 물씬 풍기는 전남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2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장흥에서 제법 큰 어촌 마을이다. 18번 국도가 지나가는 마을 입구 왕복 2차선 도로옆. 슬레이트 지붕 올린 단층 건물은 한눈에 봐도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한글로 또박또박 적힌 `수문이발관'이라는 간판이 아니었다면 무심코 지나칠 뻔 했다. 네댓 평 남짓 될 듯한 이발관 안에는 검은 테두리의 거울 네 개가 사이좋게 나란히 걸려있고, 선반위에 놓여 있는 14인치 컬러TV에서는 색 바랜 화면이 연기처럼 흘러나오고 있다. 유리로 된 약장에는 녹슨 도로코 면도날과 사용하지 않는 이발도구가 골동품처럼 수북이 쌓여 있고, 하얀 가운을 입은 이발관의 주인은 낚싯줄로 군데군데 얽어맨 파리채로 썰렁한 이발관 허공만 쉴 새 없이 쫓고 있다.
“요새는 아그들도 백프로 미장원에 가뿐께로 찾는 손님이 없당께로. 내 또래들이나 심심 혀서 놀러 오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만 하루에 서너 분이나 오실랑가 몰것네.” 수문이발관 주인인 이수신씨(56)의 말이다. 무허가 이발사 노릇을 하던 부친의 어깨너머로 배운 이발 기술. 정식으로 이용면허증을 따서 손에 가위를 쥔 지 어느덧 40년이 넘었다고 했다. “울 아부지가 옛날에는 집집이 봄엔 보리 서 되, 가슬 타작 땐 쌀 두 되씩 `나가시'를 받아갖고 머리를 잘랐던 시절도 있었다하데. 그것도 뭣이냐, 부잣집 일꾼들이 들새경 날새경 받고 살아가던 시절 야그지.” 지금처럼 미장원이 많지 않았던 시절에는 명절이 다가오면 하루에 서른 댓 명씩 머리를 잘라줘야 했을 정도로 이씨도 바빴다고 했다. 90년대 들어 동네에 젊은 사람들이 거의 없다시피 해지면서 바빴던 손이 한가해 졌다며 이씨는 마디 굵은 손을 매만진다. “인자 이 거 해갖고는 생활이 안되지라.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뭐 딱이 다른 할 일도 없응께로 이라고 있제. 글고 내가 이거 안 하믄 인자 누가 할 사람도 없는 기라...”
<4>서울의 가장 오래된 아파트-회현 시범아파트(2007년 9월 10일)
음식에도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원조집이 있듯이 아파트도 `원조집'이 있을까. 광복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1958년에 세워진 서울 성북구의 종암아파트. 4층짜리 건물 4개동에 불과했지만 종암아파트는 아파트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종암아파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원조는 아니지만 `시범'이 되는 아파트는 아직 서울에 한군데 남아 있다. 중구 회현동의 회현제2시범아파트가 바로 그곳이다. 준공된 지 올해로 37년이 되는 회현시범아파트는 현존하는 서울 최고(最古)의 아파트. 하지만 초고층 `명품'아파트가 거대한 숲을 만들고 있는 서울에서 회현시범아파트 역시 몇 년 후에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될 듯 하다.
남대문 시장에서 남산N타워를 바라보며 좁은 언덕길을 오르기를 20여분. 마치 70년대를 재현하는 거대한 영화 세트장처럼 생긴 색 바랜 아파트가 가쁜 숨을 맞이한다. 아파트 입구에 적혀 있는 `회현 시범 아파트'라는 팻말이 옛 명성을 자랑이라도 하듯 큼지막하게 걸려 있다. 시범아파트는 1970년 날림공사로 인해서 맥없이 무너져 내린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직후, 당시 서울시장이 이곳을 본보기로 삼아 튼튼하게 지으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0층짜리 건물인데도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하지만 아파트 6층과 7층에는 언덕길과 연결된 `구름다리'가 2개나 있어 어렵지 않게 아파트를 오르내릴 수 있게 돼 있다. `ㄷ'자 모양의 아파트 안쪽 마당은 가장 인상적인 풍경. 계단을 따라 이어진 언덕 화단에는 100여개의 장독이 고개만 내민 채로 사이좋게 묻어져 있다. 시범아파트에서 30년을 살았다는 김금래할머니(75)가 냉장고가 없던 시절부터 묻어 놓은 장독이라며 옛 얘기를 꺼내 놓는다. “공용 화단에 하나둘 묻기 시작한 장독을 두고 김장김치를 꺼내 먹는 겨울철이면 서로 자기 장독이라며 이웃끼리 아침마다 다툼도 참 많았었지. 하지만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지금은 장독도 속이 많이 비었고, 그나마 싸울 이웃도 이제는 많이 떠나 버렸으니, 쯧쯧쯧.”
오랫동안 삶의 터전을 일궈온 주민들에게 몇 해 전부터 나오고 있는 개발 계획이 반가운 소식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37년 동안 353세대의 서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던 시범아파트. 지난해부터 빈집이 부쩍 늘기 시작해 85세대가 이미 집을 비운 상태다. 입주 때부터 살아온 아파트 터줏대감 강옥남할머니(87)가 취재를 마치고 떠나는 기자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읊조렸다. “나 죽기 전까지는 허물지 말았으면 좋겠건만. `든사람은 몰라도 난사람은 안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지. 많이 떠나서 섭섭하기는 하지만 나는 정들어서 절대 이곳을 못 떠나. 여기는 단순히 사람 사는 곳만은 아니거든...”
<5>칼가는 노인(2007년 11월 12일)
이정성옹(90)은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서 칼 가는 할아버지로 통한다. 할아버지에게 칼 가는 것은 일흔이 넘어서 새롭게 시작한 천직과도 같은 일.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30살 젊은 나이에 고향인 경북 예천 산골마을을 떠나 무작정 상경한 할아버지는 배추장사와 지게꾼으로 연명하다 6.25전쟁을 맞았다. 전쟁이 끝나고 시작한 일은 부잣집에서 장작을 패주는 일. 하지만 그 돈벌이로는 어린 자식들을 키우기가 막막했다. 허드렛일을 해주러 들어간 작은 철근 공장. 다행히 할아버지의 부지런함을 눈여겨 본 공장장의 배려로 고철을 녹여 철근을 뽑아내는 안정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 뜨거운 쇳물 앞에서 매일같이 굵은 땀방울을 흘려야 했지만 5남매를 키워야하는 생활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할아버지의 이마에 세월의 흔적처럼 굵은 주름살이 새겨진 20년 전. 장성한 자식들이 차려준 칠순 잔칫상 앞에서 할아버지는 비로소 참았던 뜨거운 눈물을 마음껏 흘렸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땀방울은 칠순이 넘어서도 마를 날이 없었다. 극구 말리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칼 가는 일을 새롭게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담뱃값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시작했지만 칼끝의 소리까지 들을 줄 아는 할아버지의 야무진 솜씨에 단골까지 생겼다. 아무리 잘 들던 집안의 부엌칼도 세월이 흐르면 칼날이 무뎌지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쩌렁쩌렁 울리는 `칼 갈아요' 라는 할아버지의 외침은 빈 골목길을 채워주는 반가운 손님이 되었다. “옛날에 인심이 물 흘러가듯 좋았을 때는 막걸리도 내주곤 했지. 그러면 덤으로 칼을 하나 더 갈아주기도 했어. 하지만 지금은 문전박대 안당하면 다행이지...” 할아버지가 칼 하나를 가는 데 드는 시간은 20여분. 손쉽고 빠른 그라인더 대신에 시간이 걸려도 숫돌에 칼을 가는 할아버지의 고집 때문이다. “그라인더는 숫돌보다 못해. 말 못하는 무딘 칼도 정성을 알아보는 법이거든...”
한번 집을 나서면 해가 져서야 끝이 나는 한결같은 생활.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연장통을 어깨에 메고 하루 종일 골목길을 누비고 다닌다. 하지만 단 한번도 밖에서 점심을 사먹는 적이 없다. 점심 값이 아까워서다. “할멈한테 용돈이라도 주려면 점심은 어림도 없어. 환갑을 넘긴 큰아들이 아침마다 연장통을 숨겨 놓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데 아무도 못 말려..” 할아버지는 오늘도 멜빵끈 나무상자에 손때가 묻은 숫돌 두개와 물통 하나를 담고 한쪽으로 기우는 어깻죽지로 집을 나선다.
`카~알 갈아요'
<1>설앞둔 고향마을(2007년 2월 12일)
[NIKON CORPORATION] NIKON CORPORATION NIKON D1H (1/200)s F7.1
넉넉한 악양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 상신흥마을. 악양에서 가장 높은 마을인 이곳을 사람들은 `땅번지'라고 부른다. 소설 `토지'의 무대로 등장하는 평사리와는 동서로 마주보는 언덕 위에 있다. 높은 산을 등지고 있는 땅번지는 그래서 다른 곳보다 해가 늦게 든다. 잘 맞춰진 알람시계처럼 수탉이 홰를 치며 `꼬끼오~'하고 목청껏 외치고 나면 동네 굴뚝마다 밥 짓는 연기가 하나 둘 피어오른다.
땅번지에서 5대째 살고 있는 김영호 할아버지는 아침밥을 먹자마자 낫과 지게를 챙겨서 사립문을 나선다. 수도꼭지만 틀면 언제든 온수가 콸콸 쏟아지는 편한 세상이지만 땅번지 사람들은 아직도 나무로 구들장을 달궈 난방을 한다. 여든을 넘긴 나이지만 할아버지는 농번기인 겨울에는 어김없이 지게를 메고 땔감을 구하러 산으로 향한다. 더군다나 설을 며칠 앞둔 지금은 겨울 중 가장 바쁠 때다. 설에 찾아올 자식들과 손자들을 생각하면 장작을 쌓아둔 마당이 너무 휑해 보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야 땔감을 지게에 가득 싫고 파릇파릇한 보리가 어린 고개를 살포시 내밀고 있는 논둑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 왔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할아버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지만 장미 담배를 물고 있는 주름진 입가에는 한껏 웃음이 묻어나고 있었다.
김 할아버지와 돌담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는 이다순 할머니(74)는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은 마당에서 설에 쓸 쌀을 키로 까불고 있었다. 꽃무늬 몸뻬 바지를 입고 챙이질을 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개가 핥아 놓은 죽사발 맨쿠로 잘 생긴 영감이 있었는데 먼저 가부리고 말았는기라...” “청춘이 눈 깜짝라 사이제. 늙은 것이 남의 일 같더마는 어느새 하나씩 가부리고. 그래도 우짜노 묵고 살라 카이...” 힘을 받은 할머니의 챙이질에 키를 떠난 쭉정이와 티끌이 허공에서 춤을 추며 맥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짧은 겨울해가 악양 들판을 지나 섬진강 너머 광양 백운산 머리에 떨어질 무렵 땅번지에도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금실 좋기로 소문난 살구나무집 서금순(83) 할머니는 서둘러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핀다. 사랑방에 누워있는 김홍우(87) 할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하다. 18살에 시집와 5남매를 낳고 65년을 함께 살았다고 한다. “핵교도 제대로 몬 갤차 놓은 게 자식들한테 제일 미안체...” “그래도 명절 때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자식들이 그리 고마운기라...”
<2>오지마을 이야기-경북 성주 작은동 마을(2007년 6월 4일)
아련한 추억의 모퉁이를 돌아 시골버스가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 산길을 달려온다. 버스가 향하는 곳은 작은동(鵲隱洞)마을. 강원도 오지마을도 울고 간다는 작은동 마을은 경북 성주군의 하늘아래 첫동네다. 거뫼, 삼거리, 덕골, 개티, 배티.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다섯 부락이 하늘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한때 백여 가구가 넘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절반으로 줄었다. 젊은이들이 모두 도회지로 떠난 마을에는 노인들만 남아 있다.
모내기가 한창인 작은동 마을. “저수지 물을 댈 수 있는 아랫동네는 모내기가 끝이 났는디 비가 선낫바께 안온 윗동네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째” 환갑을 갓 넘긴 임용덕(61)씨는 노인들이 대부분인 마을에서 힘깨나 쓰는 젊은 축에 속한다. 도시에서 중장비 기사 일을 하던 임씨는 10년 전 마을 저수지 공사를 하러 왔다가 조용한 마을에 반해서 눌러 앉았다고 한다. 윗동네 거뫼마을 임여자(66) 할머니는 마을 유명인사다. 지난해 텔레비전에 얼굴이 나오고부터는 다른 마을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던 기자에게 할머니가 한마디 던진다. “젊은이 어데서 왔노? 늙은 할매들만 있는데 찍을게 뭐있따꼬. 날도 더분데 고생할 것도 움따.” 할머니는 한바탕 너털웃음을 지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부부싸움을 해도 말길 사람이 움따. 다들 먼디 살아서 싸우는 소리가 듣기지도 안하재. 그래도 우짤기고, 싸울 영감이라도 있응께 심심치 않아 좋은 기라...”
성주군에서 유일하게 비포장 길로 버스가 다니는 작은동 마을. 하루에 두 번 마을로 들어오는 시골버스는 마을 노인들이 세상으로 나가는 유일한 수단이다. 꼬불꼬불 산길을 덜컹덜컹 뽀얀 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시골버스의 모습이 도시에서 온 기자에게는 낭만적으로 보였지만 산골마을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겨울나무처럼 앙상한 노인들에게는 불편한 생활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3>추억의 시골 이발관 (2007년 9월 3일)
<가위소리만 남은 추억의 시골 이발관>
집집마다 `바리깡' 하나쯤은 있었던 어린 시절. 동네 이발관 육중한 의자 팔걸이에 널빤지 깔고 앉아 머리를 자르는 것은 호사스러운 일이었다. 수세미로 머리를 박박 문질러 댈 때면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느라 눈물 찔끔 흘린 적도 있지만 이발사 아저씨의 바리깡 솜씨는 어머니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었다.
읍내에 뚫린 신작로보다 더 반듯하게 머리를 잘라주던 어린시절 그 이발관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을까. 무뎌진 바리깡 날 때문에 머리카락이 뜯겨도 소리 내어 울지 못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오래된 시골 이발관을 찾았다. 갯내음 물씬 풍기는 전남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2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장흥에서 제법 큰 어촌 마을이다. 18번 국도가 지나가는 마을 입구 왕복 2차선 도로옆. 슬레이트 지붕 올린 단층 건물은 한눈에 봐도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한글로 또박또박 적힌 `수문이발관'이라는 간판이 아니었다면 무심코 지나칠 뻔 했다. 네댓 평 남짓 될 듯한 이발관 안에는 검은 테두리의 거울 네 개가 사이좋게 나란히 걸려있고, 선반위에 놓여 있는 14인치 컬러TV에서는 색 바랜 화면이 연기처럼 흘러나오고 있다. 유리로 된 약장에는 녹슨 도로코 면도날과 사용하지 않는 이발도구가 골동품처럼 수북이 쌓여 있고, 하얀 가운을 입은 이발관의 주인은 낚싯줄로 군데군데 얽어맨 파리채로 썰렁한 이발관 허공만 쉴 새 없이 쫓고 있다.
“요새는 아그들도 백프로 미장원에 가뿐께로 찾는 손님이 없당께로. 내 또래들이나 심심 혀서 놀러 오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만 하루에 서너 분이나 오실랑가 몰것네.” 수문이발관 주인인 이수신씨(56)의 말이다. 무허가 이발사 노릇을 하던 부친의 어깨너머로 배운 이발 기술. 정식으로 이용면허증을 따서 손에 가위를 쥔 지 어느덧 40년이 넘었다고 했다. “울 아부지가 옛날에는 집집이 봄엔 보리 서 되, 가슬 타작 땐 쌀 두 되씩 `나가시'를 받아갖고 머리를 잘랐던 시절도 있었다하데. 그것도 뭣이냐, 부잣집 일꾼들이 들새경 날새경 받고 살아가던 시절 야그지.” 지금처럼 미장원이 많지 않았던 시절에는 명절이 다가오면 하루에 서른 댓 명씩 머리를 잘라줘야 했을 정도로 이씨도 바빴다고 했다. 90년대 들어 동네에 젊은 사람들이 거의 없다시피 해지면서 바빴던 손이 한가해 졌다며 이씨는 마디 굵은 손을 매만진다. “인자 이 거 해갖고는 생활이 안되지라.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뭐 딱이 다른 할 일도 없응께로 이라고 있제. 글고 내가 이거 안 하믄 인자 누가 할 사람도 없는 기라...”
<4>서울의 가장 오래된 아파트-회현 시범아파트(2007년 9월 10일)
음식에도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원조집이 있듯이 아파트도 `원조집'이 있을까. 광복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1958년에 세워진 서울 성북구의 종암아파트. 4층짜리 건물 4개동에 불과했지만 종암아파트는 아파트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종암아파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원조는 아니지만 `시범'이 되는 아파트는 아직 서울에 한군데 남아 있다. 중구 회현동의 회현제2시범아파트가 바로 그곳이다. 준공된 지 올해로 37년이 되는 회현시범아파트는 현존하는 서울 최고(最古)의 아파트. 하지만 초고층 `명품'아파트가 거대한 숲을 만들고 있는 서울에서 회현시범아파트 역시 몇 년 후에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될 듯 하다.
남대문 시장에서 남산N타워를 바라보며 좁은 언덕길을 오르기를 20여분. 마치 70년대를 재현하는 거대한 영화 세트장처럼 생긴 색 바랜 아파트가 가쁜 숨을 맞이한다. 아파트 입구에 적혀 있는 `회현 시범 아파트'라는 팻말이 옛 명성을 자랑이라도 하듯 큼지막하게 걸려 있다. 시범아파트는 1970년 날림공사로 인해서 맥없이 무너져 내린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직후, 당시 서울시장이 이곳을 본보기로 삼아 튼튼하게 지으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0층짜리 건물인데도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하지만 아파트 6층과 7층에는 언덕길과 연결된 `구름다리'가 2개나 있어 어렵지 않게 아파트를 오르내릴 수 있게 돼 있다. `ㄷ'자 모양의 아파트 안쪽 마당은 가장 인상적인 풍경. 계단을 따라 이어진 언덕 화단에는 100여개의 장독이 고개만 내민 채로 사이좋게 묻어져 있다. 시범아파트에서 30년을 살았다는 김금래할머니(75)가 냉장고가 없던 시절부터 묻어 놓은 장독이라며 옛 얘기를 꺼내 놓는다. “공용 화단에 하나둘 묻기 시작한 장독을 두고 김장김치를 꺼내 먹는 겨울철이면 서로 자기 장독이라며 이웃끼리 아침마다 다툼도 참 많았었지. 하지만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지금은 장독도 속이 많이 비었고, 그나마 싸울 이웃도 이제는 많이 떠나 버렸으니, 쯧쯧쯧.”
오랫동안 삶의 터전을 일궈온 주민들에게 몇 해 전부터 나오고 있는 개발 계획이 반가운 소식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37년 동안 353세대의 서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던 시범아파트. 지난해부터 빈집이 부쩍 늘기 시작해 85세대가 이미 집을 비운 상태다. 입주 때부터 살아온 아파트 터줏대감 강옥남할머니(87)가 취재를 마치고 떠나는 기자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읊조렸다. “나 죽기 전까지는 허물지 말았으면 좋겠건만. `든사람은 몰라도 난사람은 안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지. 많이 떠나서 섭섭하기는 하지만 나는 정들어서 절대 이곳을 못 떠나. 여기는 단순히 사람 사는 곳만은 아니거든...”
<5>칼가는 노인(2007년 11월 12일)
이정성옹(90)은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서 칼 가는 할아버지로 통한다. 할아버지에게 칼 가는 것은 일흔이 넘어서 새롭게 시작한 천직과도 같은 일.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30살 젊은 나이에 고향인 경북 예천 산골마을을 떠나 무작정 상경한 할아버지는 배추장사와 지게꾼으로 연명하다 6.25전쟁을 맞았다. 전쟁이 끝나고 시작한 일은 부잣집에서 장작을 패주는 일. 하지만 그 돈벌이로는 어린 자식들을 키우기가 막막했다. 허드렛일을 해주러 들어간 작은 철근 공장. 다행히 할아버지의 부지런함을 눈여겨 본 공장장의 배려로 고철을 녹여 철근을 뽑아내는 안정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 뜨거운 쇳물 앞에서 매일같이 굵은 땀방울을 흘려야 했지만 5남매를 키워야하는 생활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할아버지의 이마에 세월의 흔적처럼 굵은 주름살이 새겨진 20년 전. 장성한 자식들이 차려준 칠순 잔칫상 앞에서 할아버지는 비로소 참았던 뜨거운 눈물을 마음껏 흘렸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땀방울은 칠순이 넘어서도 마를 날이 없었다. 극구 말리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칼 가는 일을 새롭게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담뱃값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시작했지만 칼끝의 소리까지 들을 줄 아는 할아버지의 야무진 솜씨에 단골까지 생겼다. 아무리 잘 들던 집안의 부엌칼도 세월이 흐르면 칼날이 무뎌지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쩌렁쩌렁 울리는 `칼 갈아요' 라는 할아버지의 외침은 빈 골목길을 채워주는 반가운 손님이 되었다. “옛날에 인심이 물 흘러가듯 좋았을 때는 막걸리도 내주곤 했지. 그러면 덤으로 칼을 하나 더 갈아주기도 했어. 하지만 지금은 문전박대 안당하면 다행이지...” 할아버지가 칼 하나를 가는 데 드는 시간은 20여분. 손쉽고 빠른 그라인더 대신에 시간이 걸려도 숫돌에 칼을 가는 할아버지의 고집 때문이다. “그라인더는 숫돌보다 못해. 말 못하는 무딘 칼도 정성을 알아보는 법이거든...”
한번 집을 나서면 해가 져서야 끝이 나는 한결같은 생활.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연장통을 어깨에 메고 하루 종일 골목길을 누비고 다닌다. 하지만 단 한번도 밖에서 점심을 사먹는 적이 없다. 점심 값이 아까워서다. “할멈한테 용돈이라도 주려면 점심은 어림도 없어. 환갑을 넘긴 큰아들이 아침마다 연장통을 숨겨 놓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데 아무도 못 말려..” 할아버지는 오늘도 멜빵끈 나무상자에 손때가 묻은 숫돌 두개와 물통 하나를 담고 한쪽으로 기우는 어깻죽지로 집을 나선다.
`카~알 갈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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