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들어 하늘이 말갛게 개고, 아기 잇몸에 앞니가 돋듯 봄밤 하늘에 별들이 돋는다.
안드로메다에서 수억 광년을 지나오는 별빛을 바라보며 저 하천 쪽에서 우는 개구리 울음소리에
망연히 귀를 기울인다.
페루에서 한 늙은이가 마른 기침을 하고, 쿠바의 아바나에서 결혼한 지 넉 달 된 젊은 여자가
집에서 방금 건강한 사내애를 출산하고, 중국의 난징에서 수를 놓던 열일곱 살의 소녀는 방금
잠자리에 들었다.
어디선가 멧비둘기가 낮고 탁한 소리를 내며 울고, 벚꽃들은 하염없이 떨어지고,
수명을 다한 별들은 블랙홀 속으로 사라지는 봄밤이다.
나는 술에 취하지 않은 채 맑은 정신으로 검은 밤의 한가운데 뜰의 끝자락에 서있다.
낮에 잉잉거리던 벌떼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복과 훼는 어디에 웅크리고 있을까.
파랗게 빛나는 지구별이 우주라는 바다 위로 끝도 없이 흘러간다.
내가 홀로 연모하는 그 여자도 지금쯤은 잠이 들었겠다.
내 허벅지는 대리석처럼 차갑고, "번개로 가득 찬 항아리"같은 내 뇌는 조용하다.
살아서 몇 줄의 시와 몇 권의 책을 겨우 썼을 뿐, 나는 큰 보람이 없었다.
석류는 가을에 속을 채우며 붉게 익지만
나는 언제쯤 홍보석같이 빛나는 붉은 알갱이들로 꽉 찬 채 둥그렇게 익어갈 수 있을까.
(장석주, '느림과 비움의 미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