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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총怱怱

                                                                                                                                        2월25일. 서오릉에서


(어제부터 주자청의 산문집 '아버지의 뒷모습'을 읽기 시작했다.
오늘, 퇴근길 전철 안에서 읽다가 구절구절 마음에 와 닿은
그의 나이 25살에 쓴 '총총'을 인용한다.)

제비는 가도 다시 올 날이 있고,
버들가지는 시들어도 다시 푸른 날이 있고,
복사꽃은 져도 다시 필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똑똑한 그대, 나에게 알려주세요.
우리의 세월은 왜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건가요?
누군가 훔쳐가버린 것이군요.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디에 숨어 있나요?
스스로 도망갔나요? 그럼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요?

나는 그들이 내게 얼마나 많은 날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손은 점점 비어만 갑니다.
가만히 헤아려보니 팔천여 낮밤이 내 손에서 빠져나갔더군요.
마치 바늘 끝에 대롱거리는 물 한방울이 드넓은 바다에 떨어지듯이
나의 세월은 시간의 흐름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소리도 없이, 그림자도 없이, 나는 땀이 고여오고, 눈물이 글썽임을 어쩔 수 없습니다.

기왕 흘러가는 것은 간다고 치고, 오는 것은 온다고 하더라도,
가고 오는 그 기간은 어찌 이리 총총怱怱한가요?
아침에 눈을 뜨면 작은 방안으로 두세 줄기의 햇살이 비스듬히 내비칩니다.
햇살도 발이 달렸는지 조용히 은밀하게 이동합니다.
나 역시 망연히 덩달아서 방안을 맴돌았지요.

세수를 할 때는 세월이 세숫대야 속으로 지나가고,
식사를 할 때는 그릇을 스쳐갔습니다.
묵묵히 있을 때는 멍한 두 눈동자 앞을 지나갔습니다.
나는 세월이 너무도 총총하게 지나가는 것을 알아채고는 손가락을 펼쳐 막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움켜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어두어졌습니다. 나는 침상에 누웠지요.
그는 날렵하게 내 몸을 가로질러 발가락 쪽으로 날아갔습니다.
내가 눈을 부릅뜨고 태양과 작별을 하면서 이제 하루가 흘러가버린 것입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쉽니다.
그러나 새로 시작되는 해 그림자는 또다시 탄식 속에 쏜살같이 지나가 버립니다.

이렇게 날아가듯 도망치는 세월 속에,
또한 천문만호千門萬戶의 세월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저 떠돌았을 따름이지요. 마냥 바빴을 뿐이지요.
총총히 지나가버린 팔천여 일 동안 떠돈 것 말고 또 무엇이 남았겠어요.
지난날들은 마치 가벼운 연기처럼 미풍 속에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희미한 안개처럼 아침 햇살에 사라졌습니다.
나는 도대체 무슨 흔적을 남겼단 말인가요?
한 오라기 실 같은 흔적이라도 남긴 것이 있는가요?
나는 벌거숭이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빈 몸으로 돌아갈 것인가요?
하지만 더욱 괴로운 일은 아무 한 일도 없이 지내야만 했던 것이지요.

똑똑한 그대, 나에게 알려주세요.
우리들의 시간은 왜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건가요?

               1922년 3월 28일